조직과 나, 나와 조직
나는 우리 과의 서무이다. 전에 남편이 일하던 직장에서는 차기 과장 승진 후보자가 '서무 대리'를 맡는 다고 했는데 우리 조직에서는 정반대이다. 과서무는 주로 막내의 일이다. 업무적으로는 보통 과 내의 자료들을 수합해서 기안하는 일을 담당하지만 국, 과장님이 참석하시는 회의에 필요한 중요한 자료는 팀장님 혹은 주무팀의 차석이 담당하므로 과서무는 보통의, 일상적인 자료를 수합하는 일을 한다. 또한 사무실 내 사무용품 및 탕비실의 차 재료를 살피거나 보안점검, 기록물관리 등 사무실에서 그 누구의 일이 아닌 모든 일이 과서무의 일이 된다. 서무라는 말의 '서'자가 '잡스럽다'라는 의미를 가진 한문 '서'자를 쓴 다는 것을 사람들은 많지 않다. 나는 심지어 '글, 서'자를 쓰는 줄 알았었다.
서무 (庶務)[서ː무]
명사
특별한 명목이 없는 여러 가지 일반적인 사무. 또는 그런 일을 맡은 사람.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과에서 막내도 아닌데 과서무를 맡게 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꼭 막내가 하란 법도 없거니와 하다 보니 막내보다는 나 같은 중간 연차가 과서무를 맡는 것이 업무적으로 훨씬 수월한 것 같기도 하다. 이왕 할 거 웬만해서는 잘하는 체질이지만, 과서무의 일이라는 게 경계가 모호해서 '이런 일까지 내가 해야 하나? 하고 '현타'가 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령, 사무실 화분이 말라가고 있다면 물을 주어야 하는 이는 서무인가? 또 과장님 방에 손님이 오셨다면 차를 준비하는 일은 과서무의 일일까? 요즘은 예전과 달라 과장님이라고 해도 마실 커피 정도는 본인이 알아서 챙겨 드시지만 손님이 방문한 경우는 다르다. 손님에게 차 한 잔 내어드리는 작은 성의를 보이기 위해 벌떡 일어나 탕비실로 갈 때 다른 이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일을 한다. 본인의 일이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나는 내 집에 오신 손님을 대접하는 마음으로 차를 준비하는 것이지 과서무라서 차를 준비하는 것은 아니다. 과서무의 업무에 '차 준비'는 해당사항이 없다. 지금 사무실 탕비실에서 손님의 차를 준비하는 사람을 떠올렸을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면 다음번엔 모른 체하지 말고 같이 준비해주기를 당부하고 싶다. 책상 옆에 화분이 놓였거든 한 번씩 들여다보며 물을 주는 것은 어떨까? 함께 사용하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 중에 저절로 되는 일은 없다. 아마도 팀의 막내 혹은 서무의 손길이 닿아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고유업무가 있다. 나의 주 업무는 지출원인행위이다.(원인행위란 돈을 쓰겠다는 계획과 실제로 돈이 통장에서 빠져나가기 전, 지출의 원인이 되는, 이를테면 카드결제, 계약에 대한 결재를 득하는 단계이다.) 2월 말이 회계 마감인 요즘은 하루에 50건 이상 지출 요청이 밀려드는데 예산과목에 부합하는 품의인지, 증빙서류들은 빠짐없이 갖추었는지, 집행지침에 어긋나는 사항은 없는지 꼼꼼히 확인하면서 결재를 올리다 보면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소모된다. 원인행위 단계에서 오류를 걸러내지 못하면 나중에 감사받을 때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그럼에도 실수가 생길 수 있어 결재단계에서 팀, 과장님이, 마지막으로 지출 담당자가 한 번 확인을 한 후 실제로 돈이 은행에서 빠져나가게 된다.) 그리고 학내 물품 관리 업무, 기타소득 및 퇴직소득 관리, 항공 마일리지 업무까지 범위가 다양한데 사실 업무가 여럿이 된 데에도 사연은 있다.(하아.. 왜 이렇게 사연이 많은 건지 모를 일이다.) 부서에 인사가 있을 때마다 이전 사무분장에는 없던, 동료의 것이었던 업무들이 어물쩍 내 업무가 되었다. 어느 때에는 1만큼이 빠지고 2만큼이 오기도 했고 또 어느 때에는 빠지는 것 없이 1 만큼이 추가만 되기도 했다. 해보지도 않고 못하겠다는 말은 '그냥 하기 싫다'의 다른 말일뿐이라서 보통은 네,라고 말하는데 하다 보면 또 일이 할 만해진다. 내 트렁크에 여유 자리가 있으면 친구의 짐을 나누어 담아줄 수도 있지 않은가!
며칠 전 팀장님께서 잠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셨다. 팀 간 사무분장 때문에 논란이 좀 있었을 때, 누구도 맡고 싶어 하지 않는 업무 하나를 더 맡아줄 수 있겠느냐 물으실 때도 메시지를 통해 말씀하셨는데 이번에는 따로 보자고 하시니 의아했다. 더구나 그 건에 대해서는 이미 '오케이'를 했더랬다. ' 내 트렁크가 여전히 비었으니 동료여, 어서 내게 짐을 다오!' 하는 마음은 당연히 아니었고 솔직히는 다음 정기인사에 부서 이동을 할 터이니 그때까지만 참으면 된다는 마음이었다. 2년이라는 시간과 승진이라는 호재 덕분에 다음 인사이동자 명단에 내가 포함될 확률이 크다는 걸 알고 있기에 쓸 수 있는 인심이기도 했다. 마주 앉은 팀장님은 뜻밖에도 업무 및 팀 이동에 관한 말씀을 꺼내셨다. 동료 한 명의 아이가 초등학교 방과 후 활동 신청에 떨어져서 육아를 위해 휴직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한 것이다. 총무과에서는 인력부족으로 휴직자 자리에 충원은 힘들다고 했고 과장님은 그 직원에게 업무를 바꿔줄 테니 육아시간을 충분히 활용할 것을 권했으며 동료는 이를 수용한 모양이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말이 있다. 이번 경우는 남의 업무가 쉬워 보인 모양이다. 과장님이 팀장님께 의견을 전달하셨을 때 팀장님은 허주무관이니까 지금 업무를 감당을 하고 있는 거라고, 힘든 티를 내지 않아 그렇지 쉬운 업무는 아니라고 과장님께 말씀드렸으나 과장님은 이미 결정을 끝낸 뒤였다. 사무분장은 전적으로 과장님의 권한인 데다 7급으로 승진했으니 과서무를 계속하는 것도 아니라는 보기 좋은 명분이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업무를 다시 익혀야 하는 부담감은 있지만 나는 이번에도 별 말없이 수락했다. 여러 달 손발 맞춰온 팀원을 다른 팀으로 보내고 새 사람을 맞아야 하는 팀장님의 입장도 헤아리고, 조직에 속해 있는 한 조직이 원하는 자리가 내 자리가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휴직을 원했던 것인지, 지금 업무보다 내 업무가 할 만해 보이니 적당한 구실이 필요했던 것인지 6개월 차인 그 신입직원의 속마음까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자신으로 인해 갑자기 업무가 바뀔 다른 동료들까지는 아니더라도 부서의 결원으로 인한 공석을 우려했고, 조직을 배려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조직과 개인을 완전히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능했다면 동료는 휴직을 강행했을 것이고, 나도 업무 및 팀 이동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부모와 자식이 아닌 이상 한쪽이 희생하는 일방적인 관계는 성립될 수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조직과 개인의 관계 또한 조화로워야 한다. 개인은 조직에서 필요한 것(돈이든, 관계이든, 인정이든 그 무엇이든)을 얻고, 조직은 개인의 능력을 취하는 대신 개인의 발전과 성장을 도와야 한다. 개인이 조직에서 소모품처럼 소비될 때 회의감이 들고 퇴사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내가 없어도 조직에는 나를 대체할 다른 사람이 존재하고 내가 없어도 조직은 당연히 잘 돌아간다. 하지만 나의 부재가 조직에 아쉬움을 남길 수는 있지 않을까? 있으나마나 한 사람 말고, 없으면 안 되는 사람 말고(이건 내 능력을 벗어난다) 없으면 티가 나고 아쉬운 사람이면 좋겠다. 어떤 자리에 가도 어떤 업무를 맡아도 '더할 나위 없이 YES! '인 '프로 일잘러'가 되는 것이 빽이나 뒷배 없이 오로지 '자신'이 '자산'인 내가 조직에 몸담는 동안 살아남을 방법이다.
더하는 이야기 :)
일을 잘 하는 사람이라는 기준은 뭘까요? 저는 늘 일을 잘하는 사람이고 싶은데요 팀장님이랑 이야기 나눈 바, 특출나게 일을 잘 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맡은 자리에 있는 동안 별 일 없이 잘 지나가는 사람, 즉 운이 좋은 사람이 결국은 일을 잘 하는 사람이라는 결론이에요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