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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달달 Feb 15. 2022

승진, 하고 싶지 않은데요, 하고 싶어요.

행정주사보가 되었다

2022년 2월 10일 자로 행정주사보가 되었다. 2014년 3월 1일 9급 공무원으로 입직하고  7년 11개월 10일 만에 7급 공무원이 된 것이다. 서울시교육청 동기들 중 빠른(임신과 출산을 경험하지 않고, 질병 휴직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 9급->8급, 1년 6개월, 8급->7급, 2년의 최저 연수인 3년 6개월이 지나고 승진함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더욱 뚜렷하게 보인다. 업무 특성상 소수를 채용하는 특수 직렬이 아니라 일반 행정직렬임을 감안한다면 늦어도 한참 늦은 셈이다.


승진이 왜 이렇게 늦었냐고 누가 묻기라도 하면 결혼과 함께 국립대학으로 강임 해서 온 사연부터 출산과 육아를 위해 대학의 외곽지에 근무했더니 승진이 계속 밀려서 후배들의 승진을 지켜보기만 해야했던 기막힌 사연까지 막힘없이 술술 나온다.(서러움에 눈물이 동반될 수 있으니 듣는 사람의 주의를 요합니다!) 본부에 온 지 이제 곧 2년이긴 하지만 그 이전의 시간들은 2년이 채 되지 않는 본부 경력으로 수렴된 기분이다. 일 하면서 어느 한순간도 애쓰지 않은 시간이 없었건만 모두 부정당하고 이 2년의 기간만이 내 경력의 전부인 듯한 묘한 씁쓸함이 승진의 기쁨으로 달뜬 마음을 자꾸 방해했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평소 친분이 있던 다른 과 팀장님이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주어서 승진 발령 공문이 온 줄 알았다. 곧 스무 통 가량의 메시지와 몇 통의전화가 이어졌다.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다는 메시지에는 괜히 울컥해서 슬쩍 눈물이 날 뻔했고 평소 존경했지만 함께 근무한 적은 없어 나를 잘 모르실 거라 여겼던 사무관님의 축하 메일은 감동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승진을 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와 그러면서도 발령이 날 때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라서 승진에 무관심한 사람으로 위장하는 방어기제가 끊임없이 충돌하던 때였다. 나에게 승진은 '여우의 신포도' 같은 것이라고,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라고, 승진에는 관심 없고 내 만족에 열심히 하는 거라고 끊임없이 나 자신을 어르고 달래던 때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승진 발령 공문을 보니 좋기만 했다.


아, 나 승진이 하고 싶었구나!


주변에 친한 사람들이 어쩌다 보니 다 팀장님들이라서 함께 이야기하다 모면 공통적으로 나오는 얘기가 7급일 때가 좋았다는 것이다. 8-9급은 주요 업무를 맡기에 경력이 좀 부족하고, 6급은 팀장으로서 주어지는 책임과 의무에 어깨가 매일 결릴 지경인데 7급은 보통 팀의 차석으로 업무에 매진하며 자기 기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고 말이다. 팀장님들의 달콤한 유혹의 말들이 마음에 7급 씨앗을 심어 자꾸 움찔움찔하게 했었나 보다. 어서 7급 싹을 틔워 어떤 꽃을 피우는지, 어떤 열매를 맺는지 보고 싶으니 희망을 가져보라고.


월요일 오후 사무실로 케이크 하나가 배달되었다. 처음에는 남편이 보냈나 하고 슬쩍 떠보았지만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만 재차 확인했을 뿐이다. (사실 남편은 결혼하던 해, 육아휴직 후 복직했을 때 2번, 8만원 가량의 꽃바구니를 회사로 보냈었는데 값이 비싸고 금방 시드는 꽃 처치가 곤란해 하지 말라고 한 이후부터는 얄짤없는 중이다. 말조심의 교훈을 얻었다.)  보내는 사람은 없고 받는 이에 사무실 위치와 이름, 사무실 번호가 기재되어 있었다. 내게 온 건 맞는 것 같은데 아닐 수도 있을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케이크를 오픈하지 않았다. 사무실 번호 아래에 모르는 휴대폰 번호가 함께 적혀있어 연락처를 찾아보았지만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다. 전화를 걸었다.

- 딸기 케이크가 배달되었는데 저한테 온 게 맞는지 확인하려고요.

- 아, ooo 선생님이시죠? 네, 맞아요. ㅇㅇ대학교 실장님이 우리 과장님께 부탁하셔서 과장님이 또 저한테 알아봐 달라 하셔서 제가 주문하게 됐어요. 보낸 사람은 레터링으로 되어 있긴 할 거예요.

- 잘못 온 걸까 봐 열어보지 않아서 몰랐어요. 에고, 감사합니다!


케이크를 보내신 분은 다름 아니라 외곽지에서 일의 기쁨과 슬픔*을 느끼며 잘 지내고 있던 나를 친히 본부로 등 떠밀어주셨던 실장님이셨다. 함께 근무하는 동안에도, 본부에 온 이후에도 '네가 최고!'라며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었는데 승진 소식에 육지에서 어렵게 기쁨을 나누어주신 것이다. 인연의 소중함이여! 실장님이 아니셨다면 어쩌면 승진은 관심 분야가 아니라며 외곽지를 고집하고, 하루하루 더 승진에서 멀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감사의 전화를 드렸는데 나보다 더 좋아하시는 게 느껴졌다. 목소리 톤이 명랑한 '솔'의 음정이었고 마스크를 뚫고 나오는 웃음소리로 알 수 있었다.


승진을 한다는 것이 단순히 월급 얼마를 더 받고, 덜 받고의 문제는 아니다. '쟤도 하는데 나는 왜 못해!' 하는 자존심 놀음은 더욱 아니다. 직급에 맞는 업무와 그에 따르는 책임이 있다. 맡은 자리 값을 톡톡히 해 내는 것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작지만 의미 있는 공정의 한 면이다. 누가 들으면 사무관 승진이라도 한 듯 호들갑스러워 보이겠으나 가장 아래 직급에서 시작해 두 계단 오르기까지 누구보다 힘들었던 노력의 대가는 달고 향긋하니 하루 더 즐거운 들 어떠랴. 하고 싶지 않았고, 하고 싶었던 행정주사보 승진을, 드디어 했다.


* <일의 기쁨과 슬픔> 장류진, 창비, 2019 책의 제목을 빌려씀

< 나에게 승진의 맛은 달콤한 딸기케이크로 기억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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