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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 Apr 19. 2022

연륜의 형태

나만 빼고 다 침착하더라

감기 기운이 있었던 어느 겨울의 일이다. 지금 당장 병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터라 고양이 세수만 하기로 했다. 엘리베이터 거울을 보니 누가 봐도 방금 일어난 사람의 몰골이라 괜히 모자를 고쳐 썼다. 처음으로 대 역병 시대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사가 굳이 내 마스크를 내리려는 모험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털레털레 병원을 향해 가다가 문득 아파트에 살아서 다행이다 싶었다. 아파트의 좋은 점 중 하나는 단지 안에 상가가 있고, 그중 적어도 하나는 반드시 병원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어딘가 약해지면 별 것 아닌 일에도 괜히 감동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평일 오전이라 그런가. 아니면 우리 아파트가 유난히 노인 인구 비율이 높은 건가. 그것도 아니면 병원이라서 그런 건가. 대여섯 명의 대기자 중 젊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어라, 잠깐만. 이건 그냥 내가 변변찮은 젊은이라는 뜻인걸지도. 울적해질 틈도 없이 내가 들어갈 차례가 되었고, 증상을 들은 의사는 환절기라 감기에 걸린 것 같다며 사흘분의 약을 처방해 주었다. 다행이다.  


'나 어쩌면 슈퍼 유전자일지도!'

감기는 걸려도 코로나는 안 걸리는 스스로를 뿌듯해하며 처방전이 나올 동안 뉴스를 봤다. 세상에서 뉴스가 제일 재미있는 것 같다. 어떻게 이 눈곱만 한 나라에서 매일 사건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지 신기해하고 있는데, 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얼마라고?"

이야, 할머니, 방금 앵커 목소리 하나도 안 들렸어요. 건강하시네요. 속으로 엄지를 치켜들고 계속 뉴스를 보려는데 다시 한번,

"얼마?"

"천팔백 원이요!"

귀가 좀 어두우신 모양이었다. 음, 그렇지, 그럴 수 있지. 나이가 들면 감각기관이 어떤 순서로 약해진다고 했더라. 미각-청각-시각이었던가.


아까 역병 시대라서 다행이라고 했던 거, 취소한다. 마스크 때문에 입모양을 읽을 수 없어서인지 할머니는 계속 혼란에 빠졌다. 간호사가 아무리 큰 소리로 또박또박 천팔백 원이라고 외쳐도 할머니의 귀에는 닿지 않는 듯했다. 그렇게 '얼마라고'와 '천팔백 원'이 돌림노래처럼 이어졌다. 예전에 가족오락관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저런 걸 했었지. 저 게임 제목이 뭐더라. 아아, 맞다. 고요 속의 외침. 거기까지 생각하니 갑자기 참을 수가 없었다.  

'웃지 마! 웃으면 안 된다고!'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아서 나는 마스크 속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해도 할머니가 알아듣지 못하자 간호사는 온갖 방법으로 천팔백 원을 외쳐대기 시작했다. 중년의 그 간호사는 본인도 이 상황이 웃기는지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처-언-팔백 원! 처-언-팔백 원! 무슨 광고 노래마냥 천팔백 원에 음을 붙이며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하는 바람에 나는 한층 더 입에 힘을 줘야 했다. 그래, 차라리 보지를 말자. 이 우주에는 나만 존재하는 거야. 명상하는 마음으로 눈을 감고 있는데 급기야 주변에서 난리가 났다.

"그냥 만 원짜리 하나 달라고 해요. 호호호."

"내가 지갑 받아서 꺼내드려?"

어, 네. 그래 주시면 좋죠. 저 진짜 한계거든요.


할머니가 금액에 집착했던 이유는 '돈을 적게 가지고 나왔는데 모자랄까 봐'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의 의료시스템 상 동네병원에서 노인에게 비용이 많이 나와봤자 얼마나 나오겠는가 싶었지만, 할머니는 모를 수도 있으니까. 안도한 할머니가 천팔백 원을 계산한 후 자리를 떠나고 나서야 내 처방전이 나왔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하도 웃음을 참아서인지 배가 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노래하듯 천팔백 원을 외치던 간호사의 목소리가 한동안 귀에서 떠나지를 않아서 그날 수능 금지곡이 수험생에게 얼마나 유해한지 이해했다.


병원에서의 일을 곱씹어 보면 아직도 신기하다. 몇 평 되지도 않는 공간에서 두 사람이 고래고래 소리치는 건 결코 편안한 상황이 아니다. 누군가 짜증 낼 법도 한데 대기실의 중장년들은 놀랍도록 침착했다. 이게 바로 연륜인가. 나만 웃겼나 흠흠. 할머니가 떠나고 난 후 아무도 그 이야기를 다시 입에 올려 수군대며 킬킬대지 않았고, 간호사 역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한 얼굴로 수납 창구에 서 있었다. 노인이 말을 잘 못 알아듣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누구나 늙으면 그렇게 될 수 있는 거라고. 그곳의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무심하고 따뜻한 그들의 태도에 왠지 조금 감동받았다. 역시, 사람이 어딘가 약해지면 별 것 아닌 일에 괜히 감동하게 된다니까.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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