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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 Jan 12. 2022

지금, 여기 살고 있습니까?

이 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는 작년이 되어버린, 몇 주 전의 일입니다. 여느 때처럼 그 달의 전시회 목록을 만들고 있었는데, 한 전시의 포스터를 보고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사진이 기가 막혔거든요.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 기질이 다분한 저는 결심했습니다.

'저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간다!'


 고대하던 주말이 되어 저는 이태원을 찾았습니다. 처음 가는 갤러리라 지도 어플에 의지해 길을 더듬었지요. 발을 헛디디면 그대로 이 세상과 작별할 것 같은 계단을 지나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니 기쁨이 몇 배나 커졌습니다. 그리고 커다란 통유리창 너머로 작품들을 본 순간 탄성이 나왔죠. 와, 대박!


 들어서기가 무섭게 저는 폰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습니다. 말 그대로, 끊임없이 말이지요. 요리 보고 저리 봐도 참으로 신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멀리서 봐도 가까이서 봐도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더군요. 심지어 5층짜리 갤러리에는 저 혼자 뿐이었습니다! 갤러리를 독점한 저는 미쳤다를 연발하며 온갖 구도와 거리로 사진을 찍었지요. 다른 관람객이 있으면 방해하지 않도록 얌전히 몇 장만 찍고 말았을 텐데, 혼자 있으니 체면이고 뭐고 없더라고요. 하지만 어째서인지 만족스러운 사진은 별로 없었습니다.

'역시 폰으로 찍는 건 어쩔 수 없나.'

구시렁대며 사람 눈이 최고라는 생각을 했지요. 이참에 좋은 카메라를 하나 살까 하는 시시한 생각도 했고요.


 온몸을 바쳐 사진을 찍었더니 힘들어서 잠시 쉬기로 했습니다. 커다란 전시실 가운데 서서 천천히 작품을 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상하지요? 사진을 잘 찍기 위해 작품을 꼼꼼히 봤다고 생각했는데, 카메라를 끄고 나니 비로소 작품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오히려 훨씬 더 아름다웠고 울컥하기까지 하더라고요. 작가가 이 작품들을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관람객이 무엇을 느꼈으면 했는지까지도 이해가 되어 신기했더랬습니다.  



 대 역병 시대 이전에 크리스토퍼(Christopher)라는 가수의 공연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휩쓸었던 'Bad'라는 노래의 주인공이죠. 유튜브에서 '내한 떼창'을 검색하면 나올 정도로 당시 공연은 엄청났어요. 그런 공연에 제가 무려 스탠딩으로, 크리스토퍼가 흘리는 땀까지 보일 정도로 가까이에서 봤다는 거 아닙니까! 아무튼, 인기 절정을 달리는 해외가수의 내한이었으니 사람들의 호응은 대단했습니다. 다들 손에서 휴대폰을 놓지 못했으니까요. 저 역시 노래 따라 부르랴 사진과 영상 남기랴 정신이 없었지요.


 그러던 중 크리스토퍼가 말했습니다.

"여러분, 휴대폰은 이제 그만 넣어둬요. 우리 지금을 즐겨야죠. 같이 노래 불러요."

사람들이 우르르 폰을 내리는 모습이 귀엽다는 생각을 잠깐 했고, 동시에 제가 너무 어리석게 느껴졌죠. 무려 '노래하는 다비드상(크리스토퍼의 애칭)'이 눈앞에 있는데, 폰 액정을 통해 그를 보고 있었으니까요. 잘 담기고 있는지에 정신이 팔려 공연을 보는 둥 마는 둥 했던 겁니다. 많은 가수들이 공연 시작 후에는 사진 및 영상 촬영을 금지하고 있잖아요? 저는 단순히 그게 가수에 대한 매너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관람객을 위한 조치이기도 했던 거죠.


 카메라에서 해방되어 온몸으로 즐기는 공연은 그야말로 다른 차원의 세상 같았습니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이 생생할 정도로 그날의 열기와 짜릿함은 뇌리에 깊이 박혀 있어요. 활동의 제약이 없던 시절이 그리워 찍어둔 것들을 가끔 보는데, 어째서 휴대폰 속 세상은 감흥이 덜 한 걸까요? 카메라 렌즈를 통해 뭔가가 걸러지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죠.

 


 심리학에 '지금, 여기(Here and Now)'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심리치료에도 쓰이고, 행복에 대해 말할 때 쓰기도 하죠. 말 그대로 '지금 여기 있는 나'에게 집중하라는 겁니다. 머리로만 알고 있던 것들이 갑자기 삶으로 들어오면 새로 태어난 듯한 느낌이 듭니다. 다시 누릴 수 없는 감각들과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날들, 떠올리면 너무 아련하고 애틋해서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 그걸 깨닫는 순간이 참 소중하더라고요.


 고개를 들어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전시장은 햇살로 빚은 듯한 나비들과 별처럼 흩뿌려진 꽃잎으로 가득했고, 그 가운데에 제가 서 있더군요. 아마 그 광경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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