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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 Jul 08. 2022

이렇게 제주도가 지겨울 줄 몰랐다

프롤로그: 혼자 여행을 가 보기로 했다

2박 3일로 친구와 제주도에 간 적이 있다. 어쩌다가 가게 된 것인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내가 제주도에 가는 이유야 뻔하다. 심적으로 가장 멀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로 말하자면 '바다를 건너고 싶어서' 제주도에 간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 멀리 간다고 가는 것이 고작 제주도라는 게 좀스럽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대역병 시대는 끝날 듯 말 듯 끝나지 않았고, 해외 항공료는 하늘까지 치솟을 기세였는걸. 그런 이유들로 그럭저럭 만만한 제주도로 가게 된 것이리라.


"근데 너, 한라산 가 봤어?"

"말 안 했나? 나 아차산 갈 때도 죽을 뻔했다는 거."

"못났다 진짜..."

요즘 젊은이들이 그렇게 등산을 즐긴다는데 나는 MZ세대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평지는 얼마든지 걸을 수 있는데, 계단과 오르막에서는 이상하리만치 맥을 못 춘다. 산을 올라갈 때 에너지를 다 써버리기 때문에 잘못하면 굴러서 내려가겠다 싶어 아찔하다. 아무리 산은 오르기 위해 간다지만. 모든 산에 케이블카가 설치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내 체력을 기르는 게 아무래도 빠르겠지. 우리는 한 달여의 시간 동안 체력을 길러 한라산 정상을 찍는 것을 목표로 일정을 짰다. 얼마 전 남동생도 한라산 등반에 성공하고 온지라 나라고 못할쏘냐 싶었다. 이렇게 누구에게나 계획은 있다. 그게 와장창 무너지기 전까지는.


백록담은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고 한다. 제주도가 섬인 데다가 산이 높다 보니 날씨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제주도에 있을 때 비가 온다는 예보가 뜨자 친구의 얼굴에도 먹구름이 자욱했다. 정확히 한라산 등반을 하기로 한 날부터 비가 올 예정이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강수확률은 점점 더 높아졌다.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이틀 전에 한라산 탐방예약을 취소하고 급하게 루트를 바꾸었다. 제주도는 다 좋으니까, 제주도는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으니까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이리저리 방문할 곳과 식당을 검색할 때까지만 해도, 아니 전날 짐을 꾸릴 때까지만 해도 이 여행이 망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잔뜩 피곤한 상태로 김포공항에 서 있었다. 그렇다. 여행은 이미 끝나 있었다. 문제는 내가 2박 3일 동안 도대체 뭘 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뭘 먹었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난다. 삼시세끼 뭔가 먹긴 먹었는데 이렇게 허무할 수가. 맛집이나 명소에 많이 간 것도 아니고, 인생 사진을 건져 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유를 즐기며 힐링하다 온 것도 아니다. 도대체 제주도까지 왜 간 거람. 아, 한라산 등반하려고 했었지 참.


돈과 시간만 잔뜩 버리고 온 기분이라서 집에 돌아오니 급격히 우울해졌다. 아니야. 분명히 하나는 있을 거야. 마른세수를 하며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없다. 와 씨, 없어. 진짜 없어. 인상적인 순간이 이렇게도 없는 여행은 난생처음이었다. 아무리 내 인생의 모토이자 디폴트 값이 '그럴 수도 있지'라지만 이건 못 참겠다. 나는 그날의 제주도 여행을 더 이상 여행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다. '다녀왔다'라고 할 뿐.


지금 생각해보면 제주도에서 꽤 외로웠던 것 같다. 동행이 있는데 뭐가 외로웠느냐고? 글쎄, 동행이 있어서 더 외로웠던 거 아닐까. 외로움은 혼자 있을 때보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농도가 더 진하다. 혼자일 때의 외로움이 약간의 심심함과 메뉴를 2인분 이상만 제공하는 맛집에 못 가는 아쉬움이라면, 함께일 때의 외로움은 원초적인 인간의 고독을 건드린다고 할까.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다는 슬픔, 사랑받지 못한다는 아픔, 마음 둘 곳이 없다는 쓸쓸함. 온 우주에 나만 덩그러니 있는 것 같은 그 느낌이란. 내가 너무 많은 것들을 기대하는지도 모르겠다. 여행에서도, 친구에게도.  



그러다가 내가 혼자 여행을 가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시의 나는 몹시 삐뚤어진 상태였고, 몇 주 후면 회사와 개인적인 프로젝트들이 마무리될 시점이었다. 됐어, 꺼져, 다 필요 없어. 숙소와 고속버스 티켓을 시원하게 결제하고 사무실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계획형 인간의 심장이 빠르게 콩콩 뛰는 것이 느껴졌다. 몰라. 될 대로 되라지.


그렇게 나는 장마가 한창인 7월의 첫 주말, 강원도 고성으로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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