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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냥이 Aug 28. 2023

20살. 3년간 준비한 대기업 퇴사하다.

입사 3개월 만에 대기업 퇴사를 결심한 이유. 


 동기사랑 나라사랑이라고 하던가. 20살 남들은 대학교에 입학하고 과 동기를 만들던 때 나는 회사 동기들이 생겼다. 졸업식도 하기 전에 회사에 취업하여 돈 벌러 나온 우리들. 그렇게 우린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 

 이미 고등학교 진학을 할 때부터 대기업 생산직 취업을 목표로 상고에 진학을 했었다. 정해진 수순처럼 입사 원서를 쓰고, 자기소개서를 수도 없이 고치고, 모의면접을 진행하면서 취업준비를 했었다. 혹시라도 내가 불합격할 거란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고, 계획대로 나는 원하는 회사에 원하는 지역으로 취업을 하게 되었다. 

 입사 날 느껴지던 위화감이 아직도 생생하다. 교복이 익숙한 내가 어색한 정장을 차려입고 사원증을 목에 걸고 교육을 받는다는 게 조금 무섭기도 하고 갑자기 어른이 된 느낌도 들었다.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대기업에 내가 입사를 하다니! 앞으로의 내 인생은 탄탄대로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20살이 되던 2012년 1월에 입사를 했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말일자로 퇴사를 했다. 채 3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퇴사를 하게 되었다. 몇 년을 목표로 했던 회사에 입사를 하자마자 퇴사를 결심할 만큼 무엇이 나를 그리 힘들게 했을까? 

 전 편에 쓰여있지만 시급 3,600원에 불판을 120장이나 닦을 만큼 악바리 근성을 갖고 있던 나였다. 그래서 더더욱 내가 퇴사를 하게 됐다는 게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었다. 뼈를 묻을 생각으로 입사한 회사였다.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아도 내 사전에 퇴사란 없을 것이다 굳게 믿고 있던 나였다. 이렇게 허무하게 빨리 퇴사를 하게 될 줄이야.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고 겨우 20살에 내 인생이 끝난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n연차 선배들도 인정할 만큼 나는 운이 없었다. 사수 운도 없었고 같은 부서로 배치받은 동기 한 명도 없었다. 배치받은 라인은 나와 나이가 비슷하다고 들었다. 다른 동기들 다 자동화 라인에서 쳐다만 보고 일하고 있을 때 나는 매일매일 설비와 씨름해 가며 식은땀을 흘려댔다. 이제 막 입사한 신입이 감당하기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고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다. 진정한 사회는 고독한 것이란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내 사수는 일을 안 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이 또한 퇴사하기 직전에 알게 된 사실이다. 사수는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 서있고 나는 발 동동 구르며 뛰어다니는 게 당연한 일인 줄 알았는데, 그냥 일을 안 하는 사람이었던 것이었다. 부서 배치받은 첫날을 제외하고선 밥도 같이 먹어주지 않았다. 하늘 같은 언니들이 가득한 곳에 나를 던져주고 알아서 밥 먹고 오라는 사수에게 정말 너무 서운하고 서운하고 서운했다. 사수와 부사수의 관계가 꽤나 끈끈한 분위기였던 그곳에서 나만 미운오리 새끼처럼 다른 부서에 섞여 밥 먹는 게 정말 제일 큰 스트레스였다. 굉장히 소심한 성격이었던 나는 다른 부서분들과 같이 밥 먹는 게 너무 눈치가 보였고, 어느 순간부터 밥을 안 먹기 시작했다. 휴게실 한쪽에 멍하니 앉아있는 나를 보고 언니들은 본인들 신입 때는 밥 안 먹는 건 상상도 못 하는 일이었다며 호되게 혼냈던 게 기억이 난다. 굶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는 혹독한 회사생활이었다. 

 어느 날 점심시간이었다. 밥을 안 먹기 전의 일이다. 밥을 먹고 나서 언니들과 앉아 수다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신입이 뭘 알겠는가 그냥 언니들 하는 말 들으면서 가끔 질문에 대답하면서 자리만 채우고 앉아있었다. 점심시간이 끝날 때쯤 다시 라인으로 들어가는 길 사수언니는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야!!!!!!!"

 지금 생각해 봐도 심장이 벌렁벌렁 거린다. 

 소리를 지른 이유는 내가 점심시간 다 끝나가도록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눈치껏 일찍 들어가서 일할 준비를 해야지 신입주제게 궁둥이 붙이고 앉아서 같이 떠들고 있으면 어쩌냐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억울하다. 고등학교 졸업도 못하고 온 애가 뭘 알겠는가. 좋게 좋게 말했어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을 텐데. 냅다 소리부터 지르다니... 너무 무서워서 눈물이 그렁그렁하고 다리가 달달달달 떨리던 그때의 감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 다짐했다. 내가 누군가의 사수가 된다면, 내가 누군가의 선배가 된다면 곱게곱게 알려줘야지. 사회생활은 이런 것이니 조금만 신경 써보자고 상냥하게 말해줘야지. 부디 지금도 잘 실천하고 있는 나이길 바라본다. 


 3교대로 근무를 하게 되면 올해뿐만 아니라 내년 교대 스케줄까지 이미 다 짜여 있다. 몇 년 치의 스케줄이 이미 다 짜여 있다는 것에 나는 큰 거부반응을 느꼈다. 정해진 스케줄 대로만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교대 생활 자체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부적응자가 바로 나였다. 그때는 스스로에 대한 성향이나 가치관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나이였다. 나라는 사람은 스스로 계획을 하고 실천하는 걸 중요시 생각하고 누군가의 간섭이나 억압을 굉장히 싫어하는 성격이다. 그런 나에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쳇바퀴 같은 교대 생활은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교대 근무에 적응하지 못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직업을 고를 때, 근무환경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내 성향과 잘 맞는지 충분히 고민하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근무가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오면 2층 침대에 올라가 몸을 뉘었다. 침대에 누워있으면 천장이 곧 내 얼굴로 떨어질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스트레스로 심각한 불면증을 겪던 내 머리맡에는 항상 맥주 한 캔이 놓여있었다. 술이라도 마셔야 그나마 잠이 들 수 있을 만큼 점점 정신을 놓아가고 있었다. 

 매일 밤 잠이 들기 전에 믿지도 않는 신을 찾아가며 기도했었다. 


 "출근길에 셔틀버스가 뒤집어지게 해 주세요"

 "엘리베이터가 뚝 떨어져서 사고가 나게 해 주세요" 


 사고라도 나면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이러다가 기숙사 괴담에 나오는 여사원이 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 적응하지 못하고 나만 힘들어하는 듯한 느낌을 지을 수가 없었다. 겨우 두어 달 사이에 대기업 입사의 기쁨은 이미 잊은 지 오래됐고, 그저 하루하루 도살장 끌려가듯이 셔틀버스에 몸을 싣고 겨우겨우 출근하는 부적응자만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런 일 때문에 퇴사를 결심했냐고? 아니다. 다음 편에서 더 이야기를 이어가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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