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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리킴 Feb 25. 2024

10개국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큰 행운이었다.

26년 동안 10개국에서 살게 된 배경

10개국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큰 행운이었다.  큰 꿈을 가지고 시작한 건 아니다. 그저 조금 더 큰 세상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시작점이었다.


금수저였기 때문도 아니었고, 대단히 머리가 똑똑해서도 아니었다. 다양한 경험하고 싶다는 욕망, 어떤 일이 주어지든 불만하지 않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지는 마음으로 매 순간을 보냈다. 장대한 계획을 가지고 멀리 본 것도 아니었고, 그저 찾아오는 기회에 모두 Yes라고 말했다. 그렇게 10개국에서 살고 일하게 되었다.


물론 26년째 외국생활에서 10개국을 살면서 두려움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잘 될지 안 될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결정을 해야 했다. 무엇하나 보장되는 것이 없었으니 불안함이 아예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해보는 방법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리고 내게 있어 불안함의 양보다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최고로 잘 해내고 싶다는 절실함이 더 컸을 뿐이다.


<엘리트들의 비밀 : 성공을 위한 전략적 사고>를 연재하기로 마음을 먹게 된 계기는 12년 간의 직장인 생활을 마무리하고 7 년간 사업을 하면서 목표를 향해 가다가도 때론 방황했던 시간들 속에서 마음의 지표가 된 분들의 통찰을 나누고 싶어서다. 만나기 쉽지 않은 분들이다. 운이 좋아 그분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고 성공과 행복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그들의 인사이트를 나눠주면 좋겠다 싶었다. 내게 그런 시간이 있었듯이 지금 현재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누군가가 방향을 놓친 것 같다면 상위에 위치한 엘리트들의 전략적 사고를 통해 실질적인 가치와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모두 사업가다. 

자신의 일과 삶을 경영하고, 

리더로 성장하는 업력을 

끊임없이 키워나가야 하니까 말이다. 





맨날 이사를 다녔던 라이프 노매드


사실 나도 26년 동안 10개국을 어떻게 살게 된 건지 뒤돌아보고 싶다. 여러 나라들을 이사 다닌 것은 어쩌면 유년시절의 경험이 도움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 졸업을 하기까지 5개 도시에서 살았고 한 도시에서도 집을 바꿨기에 총 22번 이사를 다녔다.


서울, 동해, 거제도, 진해, 대전 그리고 다시 서울을 찍었다. 아빠가 해군 장교 셨기에 바닷가 주변으로 이사를 많이 다녔다. 어렸을 때부터 이미 이사를 무척이나 자주 다녔고 그로 인해 본의 아니게 선행 연습이 된 게 아닐까 싶다.


외국을 나가게 된 첫 시작은 일본으로 교환학생을 가면 서다. 영어 어학연수를 위해 캐나다를 가고, 영국에서 패션전공을 하기 위해 대학을 재입학했다. 그 후 패션 디자이너로 미국, 이탈리아, 스페인, 홍콩, 중간에 잠시 한국에서 6개월 정도 일했다가, 체코, 싱가포르를 지나 지금은 핀란드에서 살고 있다.


10개국의 연대기를 짧게 정리해 봤다.

적게는 1개월부터 많게는 10년을 살면서 일하거나 공부했다.



1. 일본으로의 교환 학생 


만 19세였고 나는 X재팬의 ‘Endless Rain’을 즐겨 듣거나 너바나, 건즈 앤 로지즈 같은 헤비메탈을 들으러 다녔다. 사회에 대한 반항을 적극적으로 표출하기엔 20대 초의 나는 좀 소심했던 편이었다. 말 잘 듣고 차분해지만 밝고 유쾌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영문학, 법학, 경제관련된 과목을 들으면서 그 당시 한참 잘 나가던 일본의 문화와 경제 수준에 놀라면서도 신기하게 봤던 시절이다.



2. 캐나다로 영어 어학연수


영어영문학과 응용생물학을 복수 전공했다. 졸업 후 직장을 구할 때 어학연수로 영어 추가 점수를 얻기 위해 갔었다. 시작은 미묘했지만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있으며 나의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의사가 되겠어!‘라는 꿈을 키우며 의과대를 들어가 버려 했으나 레지던트 3년 차의 삶을 보고 금방 의사가 되는 꿈을 접었다. 캐나다 대학으로의 재입학을 위해 캐나다에서 치를 수능시험을 준비하던 차 내가 가고 싶은 길은 아니다는 생각이 깊어져 그만두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3. 영국으로 2번째 대학


’어 차피 다 어려워. 이왕이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하자!‘ 그래서 선택한 패션 디자인 전공.

너무나 하고 싶었고 관심이 많았던 분야다. 엄마 친구 딸이 패션을 전공하고 너무나 힘들어하던 모습을 보고 패션 디자인학과를 가는 것을 반대하셨던 터라 포기했던 과였다. 힘들어도 해보고 싶었던 것을 해야겠다는 강력한 바람은 결국 부모님을 설득하기에 충분했다.


처음에 반대하셨던 부모님도 내가 포트폴리오를 준비하고 유학을 가겠다고 미친 듯이 알바를 하는 모습을 보시곤 '그렇게 원한다면 가거라.'라고 말씀하시던 기억 여전히 선하다. 어려서 몰랐던 그때, 부모님께서 엄청난 고생을 하셨겠구나! 를 이제야 이해한다. 부모님께서 반대를 하셔도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막무가내로 일하며 돈을 모았고 영국대학에 합격까지 했다. 결국 나의 똥고집은 2번째 대학 입학으로 이끌었다.


첫 직장은 런던의 디자인 컨설팅 & 패션 트렌드 분석 설루션 제공하는 곳이었다. Breaux Design & Trend Forcasting Consultancy. 제품 개발, 기획, 판매의 근간이 되는 전략적인 트렌드전망과 분석 데이터를 제공하기 위해 글로벌 연구, 데이터, 디자인 방향을 각 회사에 적합하게 해석해서 제공했다. 



4. 클래식하면서도 삶을 즐길 줄 아는 이탈리아


이탈리아의 모든 것이 좋았다. 특히 로마와 프로방스 지역에 살면서 나는 멋과 여유가 있는 삶에 대한 갈망에 커졌다.  도시 구석구석이 박물관 같았고 그런 곳에 있다는 것 자체가 자유였고 행복이었다. 학교를 다니면서 틈틈이 일해 모아두었던 돈으로 진정한 ’ 로마에서의 휴일‘을 만끽했다. 3개월 동안 로마에 주거지를 잡아놓고 여행을 다녔다. 친언니들 2명도 로마로 날아와 함께 지냈다. 난 스펀지처럼 이탈리아의 멋과 삶의 여유에 관한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5. 뉴욕 뉴욕 뉴욕!


뉴욕에서 스카우트제의가 들어왔다. Ralsey Group은 자체 브랜드도 가지고 있었지만 메이시 백화점, 뉴스트럼, 화이트 스테그, 등의 회사들에게 디자인을 제공하는 디자인 컨설팅 회사이기도 했었다.

내 능력의 흔적 발견 한 첫 단추를 발견하게 된 곳이다. 다이렉터 어시스턴트 역할을 하며 회사 내 체계적인 디자인 시스템 만드는 일을 도왔다. 이때 알게 된 것은 내가 '전반적인 체계'를 잡고 각 부서의 우선순위를 디자인 팀에 방해가 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디자인 시스템을 세팅하는데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6. 홍콩 Li & Fung 그룹


Ralsey Group이 홍콩의 패션 산업 내에서 메가통급 사이즈인 Li&Fung 그룹으로 합병이 되었다. 미국 비자를 연장하기 위해 홍콩에서 머물렀다. 뉴욕에서 프로젝트를 받아 디자인을 했고, 홍콩에서 샘플을 제작하고, 트렌드 분석 자료를 제공하는 등 다양한 검수 작업을 했다. 옷을 만드는 데 있어 가장 근본적인 단계를 알게 해 줬다.


디자인 - 제작 - 샘플링 - 프로덕션의 연관관계를 공장의 관점에서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기능과 역할을 면밀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떤 디자인이 실제로 현실적으로 만들 수 있고 어떤 과정을 거쳐 나오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 줬다. 디자인 작업을 하는데 올바른 순서로 더 빠르고 정확하게 디자인 의도를 반영해 만들 수 있게 해 주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7. 한국의 직장생활, 주말도 없는 일, 일, 일


몸을 갈아 넣는 직장 생활 패턴에 처음으로 문화적인 충격을 받았다. 산업의 특징이 있겠지만 내가 기억하던 한국의 모습과 너무 달라서 충격을 받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파워게임과 위계질서 잡기 같아 적응이 쉽지는 않았다. 일이 중심이 아닌 경직된 문화, 감정싸움이 중심에 있는 조직문화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한국 직장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6개월 만에 한국을 떠났다. 



8. 스페인 , 포텐이 터진 이력의 최고봉


연매출 6000억의 42개국에 진출한 글로벌 패션 회사 Sociedad Textil Lonia에서 CH Carolina Herrera 그리고 Purificación de Garcia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로 일했다.

유사 럭셔리 브랜드에서 지속적인 러브콜을 받았던 흐뭇한 기억이 있다.



9. 싱가포르에서의 첫 리테일 사업


6년 동안 영혼을 갈아 넣어 Arium Collection 패션 브랜드를 만들었다. 성장이 급격히 빨랐던 만큼 성장통도 많았다. 배운 것이 너무나 많다.

내 인생을 다 통틀어서 이 시기가 가장 내 에너지를 바닥까지 박박긁어  쏟아 넣었던 시기이다.



10. 핀란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7년 연속)


한국과 핀란드 및 스페인을 진출하고자 하는 회사들을 연결해 주는 비즈니스 컨설팅과 컨시어즈 서비스를 제공한다.


패션 산업에서의 18년 경력과 인사이트를 기반으로 지금은 원하는 매출을 만들지 못하고 계신 사업가분들에게 비즈니스 코칭과 CEO 멘토링을 한다. 전략적 사고를 하고 체계를 갖추며 경영하는 비즈니스적 마인드셋을 갖도록 도와드리고 있다. 10개국에서 일하며 얻은 문화, 경제, 사람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해외진출을 하고 싶은 고객사들을 도와드린다. 나는 사업을 통해 자신 최고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충만감이 가득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베스트셀프를 만드는 과정에서 자신과 가족, 사회, 국가를 위한 헌신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나는 분야 최고의 사람들에게 배우며 성장하고 있다. 아프더라도 실패 역시 감당하고 딛고설 수 있었다. 특히,  싱가포르 첫 사업을 하는 동안 코로나를 겪고 회사에 비즈니스 파트너와의 위기를 맞았을 때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가장 괴로웠을 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7년 연속 등극한 핀란드에 오게 되었고 쉼 없이 달리던 삶에 'All Stop'이라는 브레이크를 세게 밟혔다. 그때는 너무 힘들고 지치고 바닥을 치는 때였지만 일이 삶에 있어 가장 행운이었음을 이젠 안다. 


극심한 우울증도 앓게 되었던 행운, 9개월 동안 좌절의 웅덩이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와중 남편의 사업에 걸린 소송 3건은 마치 엉망진창으로 꼬인 실타래 속에 갇혀있는 같았다. 버텨야 했다. 사람들이 죽고 싶은 마음이 드는지 그제야 이해하게 되었지만 죽을 생각은 안 했다. 아이를, 남편을 위해 버텨야 했다. 그 시기를 잘 견뎌냈기에 지금이 있다. 멈추는 시간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지금 쳇바퀴를 도는 삶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 시간이 지나니 이제야말로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알겠다. 건강하게 행복한 부를 이루고 싶다.


성공과 행복을 함께 손에 쥔 글로벌 사업가들을 찾아 만나러 다니기 시작했다. 성공에 도달하기까지의 그 여정, 그리고 성공 이후의 삶도 그분들의 관점에서 어떻게 느끼시는지 알고 싶었다. 15인의 엘리트들의 인생철학, 사업의 인사이트, 전략적인 사고, 그들만의 멋을 느껴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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