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시작, 아니 연속
플라잉 휠체어 29화
1980년과 81년에는 연주 횟수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29. 기적의 시작, 아니 연속
세종문화회관, 국립극장은 물론이고, 장애인 단체나 교회 초청 연주가 많아졌다. 장애인 단체나 교회에서 연주를 하면, 내가 푸르니에를 바라봤었음 직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이들이 참 많았다.
나는 정말 별 거 아니고,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우리 연주를 듣고 좋아해 주고 삶의 의지를 되찾았다고 감동받고 은혜받았다고 하면, 기분이 좋으면서도 속으로는 어찌할 바를 몰라했었다.
연주는 많아졌지만 내 인생은 여전히 불투명했다. 서울로 올라온다고 해서 우리에게 무슨 연주 기회가 생기겠는가 하며 한탄을 한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그 마음은 다 어디로 가고, 수많은 연주와 연습 스케줄로 일상을 허덕이면서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세상을 향해 불뚝불뚝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곤 했다.
정상적인 남자들은 내 나이쯤 되면 군대도 다녀오고 학교 졸업을 앞두거나 취업해서 한창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신동옥 선생님이 연습실 로비로 우리를 다 모이게 하셨다.
“너희들. 계속 연주자로 살아가려면, 그냥 이렇게만 있어서는 안 될 거 같지 않니?”
어떻게 아셨을까. 그러게 말입니다. 그 점 때문에 요즘에 가슴이 답답합니다.
“왜 아무도 말이 없어? 무슨 생각이 있는지 한 번 말해봐 봐. 뭐 하고 싶다거나. 누구에게 배우고 싶다거나. 아니면 어떤 다른 아이디어 없어? 베데스다를 더 좋은 콰르텟으로 계속할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이런 거 생각해본 적 없니?”
아니한 말로, 생각이 있다한들 그 생각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기를 하나 실천으로 옮길 돈이 있기를 하나. 지금까지 바이올린을 하면서는 언제나 감나무 아래서 익은 감 떨어지기 기다리는 사람마냥, 감이 보이면 그다음 스텝을 옮기곤 했다. 누가 뭘 제안해주고 그걸 따라가지 않는 한 우리에겐 뭘 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늘 힘들었다.
오늘따라 왜 이런 질문을 하시는 걸까. 뭔가 기분이 싸했다.
재단에서 더 이상 우리들을 후원을 못한다는 얘기를 하시려나 왜 저러실까.
“아 이거 참. 너희들 너무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니 더 이상 질문을 할 수가 없네. 안 되겠다. 그냥 말해야지 뭐. 사실은 말이다. 얘들아. 기억하지? 내가 미국에서 공부했던 학교 말이야.”
“신시내티 음대요?”
“응. 그래. 신시내티. 실은 내가 작년에 너희가 연주했던 슈베르트 죽음과 소녀 연주실황 녹음테이프를 신시내티 라살 콰르텟 선생님들한테 보냈어. 어떤지 들어봐 달라고. 혹시 제자로 받아주실 수 없는지 물어봤지.”
선생님의 목소리는 떨렸고, 입은 웃고 있었으며, 눈에서는 눈물이 글썽 글썽이고 있었다.
오. 주여.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나는 꼭 이럴 때만 주님을 간절하게 찾는다. 설마?
내 상상 너머,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맞는 걸까.
“너희들 말이야. 미국에 가서 공부하는 거 어떻게 생각하니?”
“선생님. 미국이란 곳이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곳도 아니고, 학비나 생활비도 필요할 거고. 뭐든지 서울에서 보다 훨씬 더 돈이 많이 들지 않나요? 아니. 그보다 그분들이 뭐가 아쉬워서 우리를 가르쳐 주시겠어요.”
“그러니까. 가르쳐주시겠다고 하고, 생활비도 해결되고 가기만 하면 된다면 갈 거야?”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고맙고 감사하는 말밖에는 다른 말은 없는 걸까? 사실은 감사하다는 말도 감히 나오지가 않았다.
선생님께서 자주 말씀하시던 신시내티 대학교. 라살 콰르텟의 제자가 되는 건 전 세계 콰르텟 연주자들의 꿈인데. 이게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지.
이제껏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그 어떤 기적 같은 일들을 다 합쳐도 이것보다 더 놀라울까?
일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신 선생님의 대학 동기인 아산재단의 장정자 이사님의 도움으로 유학기간 동안 생활비 일체를 후원받게 되었다. 첼로를 전공하신 장 이사님은 그동안 우리 연주를 계속 지켜보고 계셨고, 우리를 위해 도울 일이 없을까 생각하고 계셨다고 했다.
우리가 독자적으로 생활하기엔 어려움이 있고, 어학도 유창하지 않아 미국에서 빨리 적응할 수 있게 김태경 선생님도 함께 갈 수 있도록 모든 것이 준비되고 있다는 것이다.
내 귀에 들리는 얘기 중 현실감 있는 얘기는 하나도 없다.
김태경 선생님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뭐라고 했냐. 미국 사람 앞에서 연주할지도 모르니 영어 공부는 해야 한다고 했었지?”
“그런데. 너네 지금 이렇게 입을 벌리고만 있을게 아니야. 얘기를 들으니 검정고시를 봐야 한다던데. 내년 출국 전까지 고입, 대입 두 개 다 가능할까?”
아. 이런 젠장. 우리에게 가방끈이 없다.
내년 가을에 출국하려면 생각보다 시간이 없다. 10개월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검정고시 두 단계를 패스해야 하고, 영어공부도 시작해야 했다.
당장 생활계획표와 유학 준비계획서를 짜서 그날그날 해내야 하는 일들, 준비되어야 하는 과정들을 체크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거까지 알아야 돼? 하며 묻어두었던 모든 것들이 부메랑이 되어 날아왔다.
기분 좋은 날엔 무리해서 밤새도록 연습하기도 하고, 또 다른 기분 좋은 날은 이런 날 놀아야 한다고 대충대충 접어두고 놀러 나가고, 어떤 날은 우울하고 힘들어서 만사를 잊기 위해 죽도록 연습하고, 또 어떤 날은 우울하고 힘들어서 잠만 잤다.
남한테 싫은 소리는 죽어도 듣기 싫고 내 기분대로 살았었다. 그게 무슨 멋인 줄 알았던 걸까.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들이 생기니까 전에 없던 초조함과 조바심이 생겼다.
할 일은 많고 시간은 부족했다.
81년의 가을, 겨울은 연습, 연주, 검정고시 공부, 그리고 영어 공부로 이렇게 숨 쉴 틈 없이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