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잉 휠체어 25화
1979년
25. 서울
베데스다는 서울로 왔다.
이래 봬도 내가 여기저기 많이 가 본 사람인데 내가 가본 곳 중에 서울이 제일 좋았다.
부산도 가보고 일본도 가봤는데 서울이 제일 좋았다. 열심히 살다 보니 서울에서도 살게 되는구나 싶어 너무 좋았다.
정립회관 기숙사가 너무 좋았다. 기숙사는 장애인들을 위해 시설을 갖추어 놓은 곳이었기에 우리에겐 천국이었다.
여기는 모두 침대를 사용했는데, 휠체어에서 바로 연결될 수 있는 높이여서 바닥에서 휠체어로 내려가거나 기어오를 때 팔의 힘을 덜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그뿐 아니다. 정립회관에 있는 연습실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다.
더 이상 살을 에는 추위를 감당하지 않아도 되었고 연습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정립회관 안에는 직원식당이 있어서 맛도 없는 밥을 하고, 그걸 먹고, 또 치우느라 온 몸 샤워하듯 땀 흘리며 설거지를 안 해도 되니까 그것도 좋았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것은 신식 화장실이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고된 일이 사라졌다.
비 오는 날이나 한겨울에 똥내 나는 요강 치우는 일이 죽기보다 싫었는데, 신식 화장실만으로도 정립회관 기숙사는 내겐 천국이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지 어리둥절했다. 내가 무얼 해서 얻어진 것이 아닌 이 모든 상황에 입에서 ‘감사합니다.’가 절로 나왔다.
그러나 진짜 기적 같은 일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정립회관에서 생활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우리의 생활을 도와주실 분으로 김태경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김태경 선생은 서울대 대학원에서 석사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장애인 연주자들의 생활 도우미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원봉사를 자처하셨다.
국민학교 졸업장이 전부인 나, 그마저도 없는 멤버들에게 서울대란 말은 마음을 쪼그라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매일 만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런 마음은 금방 사라졌다.
김 선생님은 아침에 회관으로 와서 우리가 연습 시작한 것을 보고는 우리 방을 청소하고, 빨래도 해놓고, 점심 먹을 때면 한국의 역사, 사회 전반의 상황, 정치 등 우리로서는 난생처음 듣는 얘기들을 해 주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얘기인지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우리들 머릿속에는 역사, 정치 이런 거는 개념조차 잡혀있지 않았다. 사회적으로도 상식적으로도 기초라는 자체가 없는 우리에게 맞춤형식으로 짧게 툭툭 이런저런 얘기들을 해주기 시작하셨던 것이다.
처음 며칠은 우리만 바라봐 주는 서울대생이 신기해서 말을 들었고, 그다음엔 우리 방을 너무 깨끗이 청소해 주는 게 고마워서 들었다. 그렇게 얘기를 듣다 보니 그다음 얘기가 궁금해졌고 질문도 생겼다. 우리들의 대화는 그렇게 끊임없이 이어졌다.
언제부터인가 김태경 선생님은 아예 정립회관에서 같이 살았다.
낮에 연습할 때에는 우리가 뭐 필요한 거나 불편한 게 있을까 싶어서 책 한 권을 들고 와서는 연습실 밖에서 돌부처처럼 앉아 있었다.
잠깐이라도 소리가 안 나면 놀라며 문을 두드리고 뭐 필요하냐, 목마르지 않니, 화장실 가고 싶으면 얘기해라, 출출하지는 않으냐.
이런 보살핌을 받아본 적이 없는지라 너무 어색하고 황송했다.
선생님을 덜 움직이게 하려면 잠시라도 연습을 멈추지 않는 방법밖엔 없었다. 밤이 되면 선생님은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이런저런 책들을 가져와서 읽어보라고 권하기도 하고 어떤 책은 줄거리를 얘기해주면서 정말 재미있을 거 같지 않냐며 어린아이 꼬시듯 우리에게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뭐 다 백 번 양보해서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어디 써먹을 데도 없는 영어를 왜 가르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누가 아니? 너희들 연주 때 미국 사람이 와서 볼지.”하며 빙그르 웃으며 영어 단어를 외우게 하고, 우리한테 자꾸 짧은 문장 회화를 시켰다.
김태경 선생님과의 생활과 대화는 우리를 감동시켰고 훈련도 되었다.
나는 대화하는 데에 서투르고 성급했다. 상대방의 감정을 살필 줄도 몰랐으며 대화 안에 기승전결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멤버들끼리는 함께 한 세월이 오래되어 서로 함부로 말하기도 하고, 버럭 거리며 내 생각을 요구하기도 하고, 금방 잊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같이 연습하곤 했는데,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어쩌다가 부모님이나 동생들을 만나도 삶의 깊은 곳에 대해서는 대화하지 못했다.
식구들은 내 건강이 어떤지, 내가 연습하고 연주하는 데 불편한 것은 없는지에 대해 애달파했고 나는 그게 미안하고 싫어서 젠체하기 바빴다.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고, 가족들은 더 잘해주고 싶었던 게다.
스물네 살짜리 천둥벌거숭이가 선생님과 생활하면서 가장 깊이 깨달았던 것은, 나는 내 안의 가시를 밖으로 내어놓고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깊은 착각 안에서 살고 있었다.
나는 내가 다른 장애인들에 비해 성숙하고, 뛰어난 예술적 재능이 있으며 이놈의 소아마비만 아니었다면 세상도 씹어 먹을 만한 능력이 있다고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을 그렇게 여기며 교만 속에 살고 있었다.
상처 받는 게 싫고, 상처 받을까 봐 내가 먼저 세게 얘기하고, 묻지도 않고 내 맘대로 일을 다 처리해버리고, 되려 큰소리로 웃으며 아는 척하며 말하곤 했다.
무대로 향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관객을 향해 다 알고 왔으면서 그렇게까지 싸늘한 표정을 지을 건 없지 않냐고 속에서부터 외치며 연주를 시작했다.
내 연주가 끝나도 그런 표정인지 어디 한 번 봅시다.
우리 연주가 좋아서 감동을 받은 건지, 소아마비인 사람들이 이런 악기를 다룰 줄 몰랐다는 놀라움인 건지 굳이 구별해내고 싶어 했다.
관객과의 애증은 점차 나를 고민과 피곤에 빠트렸었다.
무대 위 연주자와 관객도 이무러워지는 시간이 필요한데, 굳이 우리가 아니라 일반적인 다른 연주자들이라도 첫 곡을 연주할 때는 서먹한 점이 있을 텐데도 나는 모든 것을 내 위주로만 생각하기 급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