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치게 많은 생각과 삶의 모순 속에서 나아지는 법
글의 퀄리티는 끝맺음에 있다. “ ~ 것이다.이다.라고 생각한다…….” 등 수많은 맺음말들. 그것이 얼마나 앞과 호응하냐 뒤와 잘 연결되느냐가 관건이다. 이 부분에 매우 취약해서 항상 내가 쓴 글들을 보면 끝을 다 잘라 버리고 싶다. 이상한 집착이다. 여전히 이 집착은 현재 진행 중이지만 포기하고 있는 집착들도 몇 개 있다. 바로 ‘쉽게 쓰여진 글이 잘 쓴 글이다.’라는 글쓰기 분야에서의 신화 같은 명언. 이 명언에 갇혀서 여전히 허우적 되고 있지만 어렵게 쓴 글이 나쁜 글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어려워야 할 글은 나름의 그 이유가 있다.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단순화시키고 간명화시키면서 잘려나간 풍부함은 어쩔 땐 너무 아쉽다. 그렇다고 만연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명확한 말도 싫다.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고가 아니고 그냥 딱 정도를 지키는 정도의 글이 좋다. 좋은 문학에는 놀라우리만큼 명료한 말도 있지만 감상을 충분히 느끼게 풍부함을 충분히 표현한 문장도 있다. 단순하게만 써서는 결코 좋은 문학의 자리를 꿰찰 수 없다.
좋은 글이 되려면 끊임없이 이런 신화들을 깨뜨려야 한다. 언젠가 좀 잘 썼다고 생각해서 동료에게 글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때 그 동료는 왜 한국말과 영어를 혼용해서 쓰냐고 말했다. 이를테면 지금 글의 맨 앞의 문장도 글의 ‘품질’이 아니라 글의 ‘퀄리티’라고 쓴 것처럼 말이다. 이 지적에 꽤 놀랐다. 평소 말습관대로 글을 쓴 것인데 글에는 어떤 엄격한 룰이 있어서 관행대로 쓰지 않으면 이상한가 생각했다. 적어도 나에겐 글의 품질보다 글의 퀄리티가 더 자연스러운 말인데 말이다. 한국어로만 글을 쓰고 외래어를 최대한 피해야 한다는 룰 때문에 글의 여러 표현들이 제약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한텐 어색한 조합일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조금 더 이 관행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헤어질 결심’이라는 영화에서도 중국 여자인 서래가 남편이 ‘마침내’ 죽었다고 말하지 않는가? 이것은 외국어가 한국어에 주는 신선한 충격이다. 언어는 이렇게 도전에 직면하면서 신선해지고 풍부해진다.
연기를 배울 때도 선생님은 늘 일상생활에서의 도전적인 태도가 연기에 그대로 표현된다고 말씀하셨다. 일상에 변주를 주지 않으면 연기는 곧 지루한 루틴에 갇혀 버린다는 것이다. 연기는 텍스트에 쓰여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넘어 서브 콘텍스트를 읽고 다양한 경험들을 통해 한 단어에도 여러 변주를 줄 수 있어야 한다. 틀을 깨는 사고가 정형적인 연기를 탈피하게 하고(마치 D.P의 조현철 연기처럼) 새로운 리얼을 만든다. 최근 김지운 감독의 거미집을 보았는데 새삼스레 송강호 배우의 연기가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들어보면 그는 긴 호흡의 대사를 정말 대사처럼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그의 캐릭터와 말투가 되어서 새로운 리얼이 되었고 관객은 그의 연기가 어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새로운 지평은 늘 약간의 낯섬에서부터 시작한다.
최근에 또 느낀 것은 ‘선 넘기’의 미덕이다. 일명 민폐 주고받기의 기술인데, 사회적으로 민폐를 주는 것은 매우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이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어쩌면 적당한 선 넘기, 민폐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친밀도를 높여주는 묘약인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는 가족들 사이에서만 민폐 주고받기가 활성화되어 있어서 몇 안 되는 가족 구성원이 일인당 2~3인분의 민폐를 감당해야 하는 비효율과 지나친 책임감에 처해 있다. 이것을 사회에 적절히 배분하는 작업이 필요한 때이다. 친구에게, 연인에게는 할 수 없는 지나치게 내밀하고 무거운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것들, 이것을 말하면 관계가 깨질 것 같은 것들은 조금씩 드러내고 조금씩 솔직해지자 오히려 그들과 더 친밀해지는 마법을 경험했다. 어쩌면 지나치게 모든 걸 꽁꽁 싸매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선을 좀 넘고 자그마한 민폐를 조금 끼쳐야 도움을 줄 틈도 있다. 인간은 도와주면서 관계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고 효용을 느낀다. 도와줄 틈을 주는 것이 왜 나쁘기만 한가? 조금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애틋함은 결국 조금씩 넘어가는 선에서, 주고받는 민폐 속에서 꽃핀다.
심리 상담을 하는 의사 선생님과 꽤 오랜 시간 이야기를 해 왔음에도 충분한 라포가 형성되지 않았다고 느꼈는데 그건 아마도 우리가 지나치게 체면을 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유교가 몸에 밴 한민족의 특성상 불편한 이야기를 질문하는 것도 먼저 꺼내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선생님이 먼저 불편한 질문을 해줬더라면 불편이야 했겠지만 더 깊이 있는 대화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내가 먼저 불편한 대답을 꺼냈어야 했나?).
참 재밌다. 일상은 지루한 루틴에 갇혀 살고 속마음은 말로 잘 표현하지 못하는 K-장녀로 살면서 틀을 깨는 삶과 글을 쓰는 삶을 꿈꾼다는 이 모순이 말이다. 여전히 이 모순 속에서 허덕이지만 조금씩 나아가고 나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