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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현 Oct 16. 2023

틀을 깨는 충돌

지나치게 많은 생각과 삶의 모순 속에서 나아지는 법

글의 퀄리티는 끝맺음에 있다. “  ~ 것이다.이다.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맺음말들. 그것이 얼마나 앞과 호응하냐 뒤와  연결되느냐가 관건이다.  부분에 매우 취약해서 항상 내가  글들을 보면 끝을  잘라 버리고 싶다. 이상한 집착이다. 여전히  집착은 현재 진행 중이지만 포기하고 있는 집착들도    있다. 바로 ‘쉽게 쓰여진 글이   글이다.’라는 글쓰기 분야에서의 신화 같은 명언.   명언에 갇혀서 여전히 허우적 되고 있지만 어렵게  글이 나쁜 글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어려워야  글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단순화시키고 간명화시키면서 잘려나간 풍부함은 어쩔  너무 아쉽다. 그렇다고 만연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명확한 말도 싫다.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고가 아니고 그냥  정도를 지키는 정도의 글이 좋다. 좋은 문학에는 놀라우리만큼 명료한 말도 있지만 감상을 충분히 느끼게 풍부함을 충분히 표현한 문장도 있다. 단순하게만 써서는 결코 좋은 문학의 자리를 꿰찰  없다.


좋은 글이 되려면 끊임없이 이런 신화들을 깨뜨려야 한다. 언젠가   썼다고 생각해서 동료에게 글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때  동료는  한국말과 영어를 혼용해서 쓰냐고 말했다. 이를테면 지금 글의  앞의 문장도 글의 ‘품질 아니라 글의 ‘퀄리티라고  것처럼 말이다.  지적에  놀랐다.  평소 말습관대로 글을  것인데 글에는 어떤 엄격한 룰이 있어서 관행대로 쓰지 않으면 이상한가 생각했다. 적어도 나에겐 글의 품질보다 글의 퀄리티가  자연스러운 말인데 말이다. 한국어로만 글을 쓰고 외래어를 최대한 피해야 한다는  때문에 글의 여러 표현들이 제약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한텐 어색한 조합일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조금   관행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헤어질 결심이라는 영화에서도 중국 여자인 서래가 남편이 ‘마침내죽었다고 말하지 않는가? 이것은 외국어가 한국어에 주는 신선한 충격이다. 언어는 이렇게 도전에 직면하면서 신선해지고 풍부해진다.


연기를 배울 때도 선생님은  일상생활에서의 도전적인 태도가 연기에 그대로 표현된다고 말씀하셨다. 일상에 변주를 주지 않으면 연기는  지루한 루틴에 갇혀 버린다는 것이다. 연기는 텍스트에 쓰여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넘어 서브 콘텍스트를 읽고 다양한 경험들을 통해  단어에도 여러 변주를   있어야 한다. 틀을 깨는 사고가 정형적인 연기를 탈피하게 하고(마치 D.P 조현철 연기처럼) 새로운 리얼을 만든다. 최근 김지운 감독의 거미집을 보았는데 새삼스레 송강호 배우의 연기가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들어보면 그는  호흡의 대사를 정말 대사처럼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그의 캐릭터와 말투가 되어서 새로운 리얼이 되었고 관객은 그의 연기가 어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새로운 지평은 늘 약간의 낯섬에서부터 시작한다.


최근에 또 느낀 것은 ‘선 넘기’의 미덕이다. 일명 민폐 주고받기의 기술인데, 사회적으로 민폐를 주는 것은 매우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이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어쩌면 적당한 선 넘기, 민폐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친밀도를 높여주는 묘약인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는 가족들 사이에서만 민폐 주고받기가 활성화되어 있어서 몇 안 되는 가족 구성원이 일인당 2~3인분의 민폐를 감당해야 하는 비효율과 지나친 책임감에 처해 있다. 이것을 사회에 적절히 배분하는 작업이 필요한 때이다. 친구에게, 연인에게는 할 수 없는 지나치게 내밀하고 무거운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것들, 이것을 말하면 관계가 깨질 것 같은 것들은 조금씩 드러내고 조금씩 솔직해지자 오히려 그들과 더 친밀해지는 마법을 경험했다. 어쩌면 지나치게 모든 걸 꽁꽁 싸매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선을 좀 넘고 자그마한 민폐를 조금 끼쳐야 도움을 줄 틈도 있다. 인간은 도와주면서 관계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고 효용을 느낀다. 도와줄 틈을 주는 것이 왜 나쁘기만 한가? 조금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애틋함은 결국 조금씩 넘어가는 선에서, 주고받는 민폐 속에서 꽃핀다.


심리 상담을 하는 의사 선생님과 꽤 오랜 시간 이야기를 해 왔음에도 충분한 라포가 형성되지 않았다고 느꼈는데 그건 아마도 우리가 지나치게 체면을 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유교가 몸에 밴 한민족의 특성상 불편한 이야기를 질문하는 것도 먼저 꺼내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선생님이 먼저 불편한 질문을 해줬더라면 불편이야 했겠지만 더 깊이 있는 대화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내가 먼저 불편한 대답을 꺼냈어야 했나?).


참 재밌다. 일상은 지루한 루틴에 갇혀 살고 속마음은 말로 잘 표현하지 못하는 K-장녀로 살면서 틀을 깨는 삶과 글을 쓰는 삶을 꿈꾼다는 이 모순이 말이다. 여전히 이 모순 속에서 허덕이지만 조금씩 나아가고 나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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