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아 지음,「부지런한 사랑」 독후감
글쓰기를 부지런하게 하기란 어렵다. 나에게 글쓰기는 이제 숨쉬기 같은 것이 되었다. 점심시간에 잠깐 쉬고 있으면 자꾸 글감이 떠올라, 낮잠을 청해보려 누워도 수첩을 꺼내 끄적이게 된다. 내 글쓰기는 여전히 마음에 드는 경우가 거의 없다. 어떤 날은 싱싱하고 이색적인 재료들로 요리를 시작했다가, 내 실력으로 감당이 안 되는 글감이어서 글이 엉성하게 마무리되기도 한다. 마치 덜 익은 생선 요리 같은 글들이다. 어떤 날은 아무 재료가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다. 시장에 갔는데 채소는 다 팔리고 없는 양, 내 머릿속에도 도저히 글감이 떠오르지 않는 날이다. 그래서 아무리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어도 글쓰기를 부지런히 하기란 참 어렵다. '매주 이 정도는 글을 써야지'라고 결심해도 글감이 떠오르지 않으면 키보드 위에서 손은 놀고 있게 된다.
오늘 나는 정말 오래간만에 글을 쓴다. 한동안 브런치에도 글을 업로드하지 않았다. 그럴 여유도 없었고, 책을 읽기도 벅찼다. 대신 그 기간 동안 나는 친구와 가족들에게 손 편지를 쓰고,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일기를 적으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내 손을 달랬다. 그리고 나에게도 다시 글을 쓸 여유가 생기자, 서가에서 책부터 꺼내들었다. 서가에는 늘 읽고 싶었지만 도전하기 어려웠던 제러드 다이아먼드의 「총, 균, 쇠」도 있었고, 인기 드라마의 모티프가 된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도 있었다. 그런데 가벼운 에세이가 읽고 싶었다. 타인의 일상을 슬그머니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을 읽고 싶었다. 몇 안 되는 에세이 중 하나였다. 이슬아의 「부지런한 사랑」. 처음에는 연애·사랑 에세이인 것 같아 꺼렸다.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어쩌면 독자의 예상과도 달리), 이 책은 글쓰기에 관한 에세이였다. 이슬아라는 (그 당시) 사회 초년생 글쓰기 교사가, 초등학생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며 배운 것들, 소통한 것들, 아이들이 쓴 글의 행간에서 느낀 것들. 이런 것들이 담겨 있는 에세이었고, 읽을수록 아이들이 하던 생각이 어느 옛적 내가 했던 생각들 같아서 와닿았고, 재미있었다. 아이들에게서 글을 얻는다는 것은 움직이는 대상을 찍는 사진사의 일과 비슷한 것 같다. "어린 시절"이라는 것은 영원할 것 같으면서 언젠가 사라지는 것이다. 「부지런한 사랑」에 담긴 아이들의 글은 그 잠깐의 순간을 포착한 것 같았다.
성적이 낮아도 좌절하지마. 성적 그 따위가 모라고 널 울리겠어. 담에 더 잘 보면 돼. 아빠에게 많은 사랑을 줘. 12살 때 군산으로 일을 가신 우리 아빠는 요즘 외롭다고 해. 정말 집착하는 정도로 아빠를 사랑해줘. 뭐 이것들만 해준다면 넌 후회없이 예쁘게 잘 클꺼야. 너를 응원할께 서현아.
- 이슬아 지음, 「부지런한 사랑」, 74쪽
이슬아 작가의 제자였던 서현이가 미래의 자신에게 쓴 편지라고 한다. 아이라고 하기에 너무 성숙한 말들을, 아이의 목소리로 한 것 같았다. 내용만 보면 어른이 쓴 것 같으면서도, 단어 선택을 보면 아이 같다. 나는 저 나이 때 저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 나는 마냥 유복하게 자라지는 않았다. 우리 부모님에게는 분명히 어려운 시간들이 있었고, 어린 나는 그때마다 무언가 뺏긴 듯한, 부족한 것만 같은 감정이 들었다. 시선을 '나'에게서 '타인'에게로 돌리기 참 어려웠던 것 같다. 그래서였을까. 고등학교 시절 부모님과 싸운 상태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 나 몰래 내 사진을 부모님께 챙겨준 친구에게 더 큰 고마움을 느꼈고, 부끄러움도 느꼈으며, 무엇보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감정을 깨우친 것 같다. 그 가벼운 사진 한 장 보내지 않는 아들한테 얼마나 서운해하셨을지 이제는 안다. 아이들은 열 살 전후로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서 타인에게로 옮긴다. 그래서 성숙한 아이의 글은 잘 익은 열매 같다. 어쩌면 나는 친구의 그 행동 이전까지 시선이 나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었던 것 같다. 수학여행에서 돌아와 집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은 괜히 더 무거웠다.
"왜 우는지 말해줄 수 있어?"
내가 묻자 그가 대답했다.
"글쓰는 게 짜증나니까 그렇죠!"
그 짜증이라면 나도 잘 알았다. 같은 이유로 울어본 나라서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당장 그만 쓰자고, 글일랑 잊고 놀러가자고. 하지만 나는 돈을 받고 고용되어 형제들의 아파트에 방문한 출장 글쓰기 교사였다. 싫어도 해야 하는 일들이 세상에는 많았다. 그만 쓰자고 말하는 대신 나는 그가 여태껏 쓴 글이 얼마나 재미있는지를 이야기했다.
- 이슬아 지음, 「부지런한 사랑」, 37-38쪽
내 첫 브런치북의 제목은 「심심한 위로의 책들을 전합니다」였다. 나는 위로가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처음 제목을 정할 때 꺼렸다. 그렇지만 첫 단추는 위로가 아닐까 싶었다. "어떻게 해야 한다"라는 말을 하기 전에 "네가 못난 탓이 아니야"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타인에게 이래라저래라 하기 전에 위로를 건넬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가끔은 정말 짜증이 났다. '누가 누굴 위로할 처지고, 누가 누구한테 어떻게 하라고 말할 처지야.' 이런 생각이 가끔은 스쳐나갔다. 나와 잘 맞지 않는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이번주는 이 주제로 글을 써야지' 결심했지만 그 주제의 답을 내가 알 수 없었다. 괜찮은 답이 떠오르면 신나게 글을 적다가 막히면 괜히 두통도 생긴 것 같고 좀도 쑤셔 침대에 누워 쿨쿨 잔 적도 있다. 처음에 이슬아 작가의 책을 읽는 동안 참 제목을 못 지었다고 생각했다. 괜히 '사랑'이라는 단어를 넣어 글쓰기에 관한 에세이라는 중요한 정보를 누락시킨 것 같았다. 책 중반을 넘어서면서 제목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글을 부지런히 사랑하지 않으면 글을 꾸준히 쓰기 참 어렵다. 누워 자다가도 다시 일어나 모니터 앞에 앉는 것은 아름다운 한글 활자와 행간의 그 빈 여백, 그것들을 내가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운동한다고 하루 종일 한 글자도 못 보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집에 들어와 새로 온 우편물의 주소만 읽어도 피로가 좀 풀리는 것 같다. 이슬아 작가도 그 기분을 아는 것 같다. 글쟁이들이 글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도 좀 시간이 지나면 다시 글을 쓰는 게, 그만큼 글을 사랑하고, 글을 통해 타인 혹은 나 자신에게 더 다가갈 수 있는 그 통로를 사랑해서라는 것. 이제 나는 가끔 글쓰기가 귀찮아지면 감기에 걸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워서 열을 식히면 일어나 다시 하는 일이 글을 쓰는 것이다. 모든 글에 공백과 여백이 있듯이, 줄과 줄 사이에는 행간이 있듯이, 사람과 글 사이에도 그런 간격이 있다.
쉼보르스카는 말했다. 자기가 쓰는 시의 유일한 자양분은 그리움이라고. 그리하여 돌아가야만 한다고. 그리워하려면 멀리 있어야 하니까. 그렇다면 작가는 어떤 일이 멀어지는 걸 보며 계속 살아가는 사람 아닐까. 멀어지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들을 기록하며 살아가는 사람 아닐까. 멀어지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들을 기록하며. 그리움을 그리움으로 두며, 하지만 결코 디테일을 잊지 않으며 말이다.
- 이슬아 지음, 「부지런한 사랑」, 173-174쪽
내 글에는 어떤 그리움이 남아있을까. 나는 무엇을 그리워하고, 어떤 일이 멀어지는 걸 보며 글을 쓰는 것일까. 이슬아 작가의 글을 읽으며 한 문장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싶은 문장은 없었다. 어떤 감정이든, 어떻게 표현하든 마치 내 이야기 같았고, 한 번쯤 나도 해본 생각들 같았다. 이 구절도 그랬다. 저물어가는 해가 은은하게 사방에 햇빛을 퍼뜨려놓고는 숨으려 하듯이, 문장과 단어들 사이로 내 마음에 퍼져가는 감정들이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나는 무엇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얼른 브런치를 다시 켜 내가 무슨 주제로 글을 써왔는지 돌이켜 봤다. 내 글들은 대부분 내가 방황했던 시절에 관한 것이다. 그 당시 내가 알았으면 좋았겠다 싶은 것들을 글로 적어, 마치 과거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적었던 것들이다.
멀어지면서도 가까이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그 시절의 나'는 갈수록 지금의 나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나'도 언제든 그때처럼 또 한 번 방황하고 길을 헷갈릴 수 있다. 그리고 어딘가에는 지금 이 순간 방황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겠지. 지나간 시간들을 회상하고 돌이키며, 누군가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넬 수 있는 글을 쓰는 것. 내가 글을 부지런히 쓰는 이유는, 부지런히 쓰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그런 의미와 이유가 있기 때문 아닐까. 누구든 글을 열심히 쓰는 사람은, 자기가 그리워하는 순간들에 강렬하게 빛나며 타들어가는 석양 같은 의미가 있어서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