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7 손톱깎이의 숨겨진 기능
찬기운 내린 범바윗골 산자락 아래.
호박들은 하얀 분가루를 칠하고 넓은 잎사귀로 제 몸을 가려보지만,
할아버지는 뿌연 안경 너머로도 어디에 숨어 있는지 다 알고 계셨다.
아마 일찌감치 눈도장을 찍어놓고 물이 오르기만을 기다리셨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어린 나는 그저 밭둑을 따라 뛰어다니기에도 바쁜 하루하루였다.
소금 한 꼬집으로 이를 닦은 할아버지는, 뒷짐을 쥐고 감나무밭을 향하셨다.
나도 뒷짐을 쥐고 눈곱도 떼지 않은 얼굴로 그 뒤를 쫓아 나섰다.
서리 밴 두둑길을 따라 걸으니 바짓가랑이에 이슬이 튀고, 덜 깬 잠이 놀라 달아났다.
식전에, 기와집 뒤로 난 우리 밭을 둘러보는 것으로 할아버지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축축 늘어진 감나무들이 있는 그 밭머리에 이른다.
감나무밭이 아니라 호박밭이었까.
호박 넝쿨은 노란 꽃을 안고 기세를 한껏 뻗다가, 찬바람에 늙은 호박으로 변해 있었다.
맷돌만 한 놈부터 울퉁불퉁하게 생긴 작은놈들까지 크기도 제각각이었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숙여 눈으로만 들춰보시더니, 그날 오후 호박들은 툇마루에 줄 세워 옮겨져 있었다.
이윽고, 닭뼈를 가르던 무쇠칼과 수없는 칼자국에 패인 나무도마 위에서 차례로 그것들을 반으로 갈라내셨다.
돌덩이처럼 단단한 껍질에 칼끝이 박혀 쩍 하는 소리를 내며 벌어질 때.
감빛 속살은 보란 듯이 드러나고, 씨앗들은 거미줄처럼, 끈적한 속살에 매달려 있었다.
할머니도 바쁘게 호박 속을 수저로 벅벅 긁어내어 살은 바르고, 씨앗은 한데 모아 칼칼이 헹구어 광주리에 고루 펴두셨다.
한 몸에서 분리된 늙은 호박고지들과 하얀 씨들은 마당에 누워 햇살에 말라갔다.
가끔 마디 굵은 손이 다가와 이리저리 파도를 내어 씨를 저으면, 바스락거리며 돌아눕는 소리까지 들려주었다.
몇 밤을 자고 났다.
깨끗하게 마른 하얀 씨들을 약불에 올려, 끝부분이 까맣게 타들어간 나무 뒤집개로 매매 저으셨다.
납작했던 호박씨는 팬 위에서 데구루루 구르더니, 한 번씩 탁탁 튀는 소리를 내며 통통해졌다.
어금니에 군물을 꼴깍이며 바라보는 내가, 요샛말로 현기증이 날 때쯤이었다.
스테인리스 쟁반에 촤라락. 따뜻한 열기가 볼을 스쳐갔다.
드디어 할머니는 호박씨 한 움큼을 양재기에 부어, 툇마루에 양반다리를 하고 자리를 잡으셨다.
한 손에는 반짝이는 777 손톱깎이도 챙겨 오셨다.
물론 이리 와라, 저리 가라 말 한마디 없으셨지만, 내쪽을 흘깃 보시며 보란 듯 호박씨를 다듬으셨다.
개중에 제일 큰 호박씨를 골라 쥐고, 마름모꼴로 네 귀퉁이를 깎아냈다.
이어 손톱으로 그 사이를 살짝 벌려 위가 뾰족한 초록빛 속살을 빼내셨다.
할머니는 초록씨 몇 알을 내게 건네고, 밀짚모자를 집어 들며 다시 밭으로 나가셨다.
그렇게 마루에 남겨진 호박씨와 나.
똑깍 똑깍...
몇 알을 까먹었다.
그러다 아까운 생각이 들어 더는 먹지를 않고 까서 모아두기만 하였다.
오늘은 그 꼬수운 초록씨맛이 생각나, 하늘에 대고 양손을 오므려 마름모 모양을 만들어보았다.
호박씨 닮은 손틈새로 가을볕이 눈 안 가득 쏟아져 들어왔다.
느리고 깨끗한 소리가 들리는 듯 하였다.
벌써 마지막 회가 되었네요.
올해 1월에 작가로 선정되어 일기 쓰듯 써 내려갔던 서툰 글이었습니다.
그동안 '호시절의 무언가'를 읽어주신 독자님들께 머리 숙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브런지작가님들 모두 존경합니다.
살포시 내밀어 봅니다.
당신은 천사와 커피를 마셔본 적이 있습니까(1994)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