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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다래

가을을 한입 베어 물다

by SuN ARIZONA




선선한 갈바람에 흰구름이 뭉글뭉글 떠다녔다.

마당에 널린 옷들은 앞 뒤로 부딪히며 바람을 따라 흔들렸다.

그 너머로 햇살이 옷사이를 스치며 작은 바람소리를 내던 오후.


마당을 가로지르는 빨랫줄에는, 내 옷과 할아버지, 할머니옷이 하늘로 날아가지

않도록 빨래집게에 붙잡혀 있었다.

얼추 해가 산등성이에 닿기 전이었다.

할머니가 산아래 밭으로 일 나가시며 빨래 걷어놓으라 하신 말씀이

떠올라 신발을 구겨 신고 마당 가운데로 나갔다.


빨랫줄은 작은방 처마에서 곡식창고 처마까지 야무지게 이어져 묵어 있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비스듬히 고여있던 대나무 바지랑대를 두 손으로 꼭 붙잡았다.

대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던 고추잠자리가 놀라 소리 없이 달아났다.


빨래 작대기를 옆으로 천천히 내리자 그제야 빨래가 내 손에 닿았다.

빨랫줄 양끝까지 옷이랑 이불이 널어질 때는 할머니가 빨래를 걷으라고 내게 시키지 않으셨다.

빨래가 흙마당에 떨어져 버리면, 그날 수고가 허사가 될 테니까.


삐-이익.

할아버지가 강아지풀이랑 여물거리를 머리 위까지 지게 속에 쌓아 올린 채, 무딘 사립문을 열고 들어섰다.

지게작대기로 새장을 비스듬히 받쳐 놓고, 그 안에서 꺼내주신 건 초록빛 다래였다.

자디잔 알들.

메추리알 만한 말랑한 다래를 두 손 가득 마루 위에 올려놓으셨다.


산등성이에 걸린 가을을 닮은 오늘.

맛보라고 건네받은 다래를 오랜만에 재회하니, 호시절 마루 위에 올려두었던 다래가 떠올랐다.

그 안에는 여름과 가을, 두 계절을 담은 단물이 가득 스며있었다.

마루 위에 앉아 다래를 먹던 어린 나와 지금의 내가, 단맛 속에서 다시 이어지는 것을 느꼈다.










살포시 내밀어 봅니다.


세월이 가면 -최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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