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인절미(引截米)

잡아당겨 자르는 떡

by SuN ARIZONA


며칠 전 할머니가 웃시장에 다녀오신 후로 집안 구석마다 맛있는 냄새가 솔솔 새어 나왔다.


홑이불이 바람에 흔들대던 높은 장대 빨랫줄.

그 끝에 걸린 네모난 건조망 안에는 배를 드러낸 양태와 눌린 서대, 입을 벌린 조구새끼들이 나란히 누워 가을볕을 받고 있었다. 마루 끝에는 바짝 마른 까만 김부각. 부엌방에는 장날 방앗간에서 팔아오신 콩가루가 올려져 있었고, 까만 칠기찬장 안쪽에는 검은 비닐봉지도 동그맣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상에 올릴 오꼬시였다.

수돗가로 돌아가보면 대야 속에는 말려 두었던 고사리와 박나물, 말린 가지들이 물에 몸을 풀며 묵은 냄새를 벗겨내고 있었다. 산자락 아래 온 집 안팎으로 명절의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말수가 적은 할아버지는 손수 만든 대나무 바구니들을 창고에서 꺼내 가을볕에 바람을 쐬셨다.

부삭 둘레를 오가며 장작을 챙기시고, 아궁이도 살피시는 듯 분주하셨다.

굽은 등뒤로 보이는 무쇠솥에는 밥냄새 품은 하얀 연기가 쉴 새 없이 올라오고 있었고.

먹감나무아래 쇠줄에 묶인 복실이의 콧구멍이 북실한 꼬리와 함께 살랑거렸다.

누워있다가도 나만 보면 벌떡 일어나 맞아주는 복실이에게, 분홍바가지로 물을 퍼다 빈 밥그릇에 가득 부어주었다.



반쯤 타들어간 장작이 잔불을 품은 채 아궁이 속으로 더 밀려 들어갔다.

고소한 밥 뜸 냄새가 내 콧속 안에 가득 돌자, 할머니는 드디어 솥단지 위에 앉은 양은찜기의 뚜껑을 열었다.

순간, 하얀 김이 한바탕 시야를 덮치더니 이내 흩어지며 찰밥이 윤기를 드러냈다.

김 너머로 할머니는 찰밥 한 옴큼을 나무 주걱에 얹혀 내게 건네주셨다.

우아- 고두밥알을 한 올 한 올을 떼어 씹으니, 입안 가득 짭조름한 단맛이 퍼졌다.


고슬한 찰밥은, 박바가지로 여러 번 헹굼질 된 돌절구통 안으로 연기와 함께 들어갔다.

이제는 할머니가 뒤로 무르시고 할아버지가 나서셨다.

나는 들지도 못하는 떡메가 힘차게 찰밥에 내려쳐졌다.

할머니가 떡에 물을 뿌리며 고르고, 할아버지는 박자를 타듯 떡을 조준해

쿵, 덕, 쿵, 덕.


곁에서 구경하는 코흘리개 나까지 세 명의 합이 더해져, 떡메질 소리에 밥이 서서히 떡으로 변하는 마법이 이어졌다.

떡이 된 밥이, 아니 큰 떡덩어리가 마루 위 다리를 펼치지 않은 큰 밥상 위로 올라갔다.

아직도 식지 않은 떡덩어리는 따뜻한 기운이 쉼 없이 올라왔다.

"바가지에 물 좀 떠서 가꼬와라"


할머니는 제법 뜨거우신지 내가 떠온 찬물바가지에 손을 넣어 식히시며, 떡덩이를 일일이 손으로 펼치셨다.

떡덩이가 식어버리기 전에 재빠르게 잡아당겨, 노오란 콩고물옷까지 입혔다.

울퉁불퉁한 듯 평평히 펼쳐진 떡덩이 위에 콩고물이 더해지면, 꼬순내가 기둥을 타고 서까래까지 올라갔다.


연이어 작은 접시를 세워 들고 돌려가며, 능숙하게 크기에 맞춰 썰어내셨다.

이제 정말 막 집어 먹어도 될 것 같은 모양이 되었지만 아직 아니었다.

콩가루를 크게 한 줌 더 흩뿌리자, 떡은 이리저리 굴리지며 아예 고소한 옷 속으로 파묻혔다.



내가 툇마루에 흩어진 콩가루를 걸레질하며 침을 삼키고 있을 때, 할아버지께 먼저 갖다 드리라는 첫 번째 인절미 접시가 나왔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인절미를 새하얀 백설탕에 찍어 드셨다.

그 뒤, 우리도 함께 맛을 보았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게 있다면, 그것은 아마 인절미였을 것이다.

씹다 보면 덜 빻아진 밥알이 느껴지던, 따뜻하고 달콤한 인절미였다.

할머니는 입을 오물거리시며, 큰 밥상판 하나의 떡을 다 썰어 대나무 바구니에 옮겨 담고, 뚜껑을 삥긋이 열어두셨다.


'이제 곧 엄마랑 언니 남동생, 아빠가 버스 타고 오겠지.'


061-52-1912

다이얼 아래 끼워져 있던 전화번호. 색바랜 전화기에서 기다리던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살포시 내밀어 봅니다.


#십오야 -김연자


keyword
목요일 연재
이전 27화목화밭에서 먹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