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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소 May 21. 2023

설계 잡부

중고 신입의 열일곱 번째 이야기

잡부: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일에 종사하는 남자.  

    

건설일을 접해본 사람이라면 ‘잡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현장의 잡다한 일들을 몸소 처리하는 사람들이란 것을 잘 알고 있다.    

  

내가 보는 관점에서는 잡부 업무도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전문성이 없다는 점이다. 내가 보는 관점으로는 높은 퀄리티의 전문성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만났던 잡부 아저씨들의 경우, 간단한 청소부터 바쁠 경우 부엌 가구 조립, 타일 작업에 용접까지 하는 분들이 많았다. 하지만 전문 업자로서 일을 주체적으로 수행하지 못한다. 그럴만한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둘째는 언제나 수동적으로 업무를 진행한다. 자신을 전문가라고 이야기하는 기술자들은 자신들이 처리해야 할 업무에 대해 시간(일정)과 돈(금액)으로 표현한다. 그러기에 자신의 업무에 대한 일정을 만들고 더 나은 방법을 찾는 것에 최선을 다한다. 심지어 자신의 분야에 관해서는 나름의 자부심이 있어 다른 전문가들과의 차별점을  두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일당’이라고 불리는 일정 금액을 받는 잡부는 그 돈을 벌기 위해 정해진 시간을 채우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책임자의 지시가 없을 시 그들은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일을 대하는 태도가 수동적이면서 해오던 일에 대해 습관적이다.    

  

마지막은 그들의 대부분이 반복적인 업무에 집중되고 업무의 범위가 명확해야 된다. 물건을 나르는 일, 청소를 하는 일, 그리고 전문 작업자들의 작업을 도와주는 일 등이 그러하다. 전문가들은 일을 시키는 이들보다 자신이 속한 분야를 더 잘 알고 능숙하기에, 업무에 관해 포괄적으로 설명해도 빠르게 이해하고 실행한다. 그러나 잡부의 일은 작업 특성상 그렇지가 않다. 단순한 일들일수록 일에 대한 경계를 명확하게 해줘야만 한다. 청소를 하더라도 정확한 구역을 나눠줘야만 하고, 물건을 나르더라도 정확한 위치를 지정해줘야 한다. 더군다나 업무 보조를 할 경우는 어느 선까지 작업을 수행할 것인지 알려줘야만 그들이 일을 할 수가 있다.

이러한 지시가 불분명할 경우, 일이 틀어지거나 했던 일을 되돌려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남자들이라면 학창 시절 학비나 용돈벌이로 노가다 현장을 기웃거리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다.

내가 경험했던 잡부의 일은 그것과는 달랐다. 큰 꿈을 안고 동업으로 시작한 건설회사가 망하고 벌이가 형평 없던 시절, 먹고살기 위해 찾고 찾아서 들어간 곳이 하수도 관로 검측하는 환경 회사였다. 학교에서 건설에 대해 배우고, 설계와 시공일을 몇 해 경험한 나름 경력 있는 엔지니어였지만, 당시 보수가 좋은 단순 잡부 일이 엔지니어 일보다 찾기 쉬웠다.     


특별한 기술을 요구하지도 않고 2인 1조로 기술자를 도와주는 역할로 전형적인 잡부 업무 중 하나였다. 

단지 이곳에서 내가 해야 하는 특별한 일이라곤 회사 트럭을 모는 것이 다였다. 면접 당시 나를 매력적(?)으로 보았던 이유가 1종 보통면허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하수도 맨홀을 검측하고 확인해야 하는 일이라 회사소유의 작은 트럭을 누군가는 몰고 다녀야만 했다. 

그러나 거친 시골길 운전을 전혀 해보지 않았던 나는 빈 농가를 차로 들이받기도 하고, 운전 미숙으로 좁은 길에 세워진 차를 긁고 다니기도 여러 차례였다. 결국에 두 번의 위험한 순간을 맞이했었고, 마지막에는 목이 잘려 죽을 뻔한 사건도 있었다. 아직도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의 나의 삶이 덤으로 느껴질 때가 있을 정도이다.      


그렇게 노가다 현장에서 잡부로 생활하던 시절을 지나 지금은 같은 분야 다른 일, 설계 일을 하고 있다. 업무의 변경으로 육체적인 안정은 찾았지만, 시공과 설계가 큰 테두리 안에서 연계된 일이기에 비슷한 일들이 이곳에서도 반복되었다.    

 

현장 업무와 달리 설계 업무라는 것이 진행하는 방식이나 시점, 돈의 규모 그리고 일의 성향 등 많은 차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나의 관점에서 다른 것들은 차치하더라도 내가 했던 ‘잡부’ 일들이 이곳에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생각으로 건축가 또는 엔지니어가 하는 일이 공간을 정의하고, 생각을 구체화하여 도면화하는 것, 구조물을 만드는데 가이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 또한 이러한 창조적인 일들을 하기 위해 건축에 몸을 담았다.

하지만 현실을 그렇지 못했다. 내가 하는 업무의 대부분이 일반적인 설계 업무보다는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보조하는 역할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현장 엔지니어들이 해야 할 일들을 대신하는 경우도 많았다. 현장 변경을 설명하기 위한 쪽도면 작성부터 부분적인 물량계산, 거기에 현장 엔지니어들이 만들어야 하는 보고서와 설명자료까지. 마치 깔때기의 끝이 나를 향해 놓인 것 마냥 잡다한 일들이 닥치는 대로 밀려들어 왔다.      


“차장님, 이번 변경 건 도면 정리해서 오후 퇴근 전까지 주시고요. 물량 계산해서 보고서 제출도 부탁드립니다.”     


“네? 물량은 저희 작업내용이 아닌데요. 그리고 보고서 작업까지 하게 되면 시간도 5일 이상은 주셔야 작성이 됩니다.”     


“아니, 보고서야 내일까지 한다고 하더라도, 물량은 도면 작성하는 사람이 뽑지 누가 뽑습니까? 도면 그리면서 길이, 면적 체크하면 금방 뽑잖아요? 일정도 바쁜데 시공팀이 다시 뽑으려면 시간 걸려서 안 돼요. 이번 주에 업체 발주 있으니까 퇴근 전까지 정리해서 주세요.”     


공사 책임자의 짜증 섞인 말투에 찍소리도 못하고 결국에 계획에 없던 야근을 시작한다. 그들은 쉽게 ‘퇴근 전까지’라는 말을 하지만, 거꾸로 말하면 ‘일이 끝나야 퇴근이 가능하다’라는 말이다.      


“요즘 노가다 옛날이랑 달라졌어요. 그렇게 무식하게 일하는 현장 없어요. 다 옛말입니다.”     


건설 일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하나같이 이렇게 대답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달리 저녁 10시를 넘기는 야근을 매일같이 하고 있다. 그것도 미국에서.     

얼마 전, 한국 포털에 뜬 놀라운 뉴스를 보았다. 기존 주 52시간에서 주 69시간 근무로 전환한다는 뉴스였다.      


‘대체 하루에 몇 시간을 야근해야 주당 69시간을 채울 수 있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면서 나의 주 단위 근무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놀라운 것은 내가 이미 새로운 정책에 맞춰 일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돈을 받고 정해진 업무를 하는 건설 현장의 잡부와 달리 한정된 기간에 한정된 돈 안에서 무한정의 일을 해야만 하는 나는 다른 형태의 잡부가 되어 있었다.     


오늘은 휴가 가기 전날 자정. 잡다한 업무에 두루뭉술한 작업지시, 점점 길어지는 작업 시간까지, 일반적인 잡부의 삶과는 다른 ‘설계 잡부’로서 지금까지도 일을 놓지 못하고 있다.     


‘아침에 비행기는 탈 수 있을라나?’


미국에서 진행했던 프로젝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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