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퇴사한아빠 Feb 24. 2024

퇴사한 아빠의 좌충우돌 성장기 #차근차근 한걸음씩

상상 과.


 매주 토요일은 로또를 사는 날이다. 로또를 사면 일요일이 될 때까지 당첨여부를 확인하지 않는다. 대신 토요일 밤에 당첨금만 확인한 뒤 마치 내가 당첨이 된 것처럼 상상의 나래를 디테일하게 펼친다. 23억이 있으면 일단 집을 사야 하니 네이버부동산에 들어가서 10억 정도 되는 집을 찾아본 후 살 것처럼 단지가 어떤지, 교통은 어떤지 확인한다. 집을 고르면 다음으론 차를 골라본다. "아내의 차는 요정도, 내차는 요정도가 좋겠군" 내손에 당장 23억이 있는 것처럼 한참을 돌아본 후 만족스러운 얼굴로 모든 가상소비활동을 마친다. 의미 없는 일이지만 나만의 상상이 누구에게 해를 끼치거나 돈이 드는 것이 아니니 누가 머라고 하겠나.


 상상은 퇴사에도 적용된다. 일이 밀려오고 책임감에 부담감이 올 때면 "퇴사하고 좀 쉬면 뭘 하지?"라는 생각과 함께 다시 한번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이번엔 손안에 든 것들을 가지고 따져본다. 은행계좌를 살펴 여유자금을 확인하고 주식을 정리한다. 하나의 바구니에 다 담아서 재분배를 시작한다. "한 달 정도 제주도에서 살아볼까?" 그럼 얼마, 해외여행도 가면 얼마, 이러저러한 생활비 얼마 하면 6개월은 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 Skyscanner를 켜고 예산안에 갈 수 있는 비행기표, 숙소 등을 알아본다. 그렇게 한 바퀴 돌다 보면 어느새 다시 일이 손에 잡히곤 했다.


현실.


 상상 속의 나래를 펼쳤을 때와 달리 실제 퇴사를 맞이하게 되니 내가 현재 가진 재능이나 준비된 계획이 참 초라하다. 계획은 너무 설계가 엉성하고, 예산은 턱없이 부족해 보여 손 대기가 조심스럽다. Skyscanner라는 앱이 어디에 쓰는 건지도 모르겠다. 온전히 현실의 상황에 집중하다 보니 즐거웠던 상상은 비현실이 되고 불안의 풍선은 점점 부풀어 오른다.


 두려우면 더 짖는다고 했던가. 퇴사를 고할땐 떵떵거리며 준비가 다 되어있고, 여유 있게 3개월은 쉴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나의 마인드셋을 완성시켜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태생이 변화에 약한 나는 쉴 수 있을 때 일을 찾아 헤매고, 놀아야 할 때 고상하게 신발끈을 풀고, 예산을 정리해야 할 때 살 것부터 생각하고 있다.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라고 배웠는데 시작은 창대했는데 끝은 심신미약이 오게 생겼다.


차근차근.


 초등학교 3학년 때였던 걸로 기억난다. 나는 무언가 조립을 하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재미였다. 그즈음 이제 레고는 우스워져 처음으로 플라스틱 한판에서 돌돌 돌려서 부품을 발라내 본드로 조립해야 하는 미국의 전투기 프라모델을 신나서 조립을 시작했다. 그 때 나는 처음으로 무언가를 조립하면서 화에 못 이겨 뒤집어져서 울었었다. 설명서는 꼬부랑글이고, 순서는 엉망이 되고, 손에 묻은 본드가 모든 잡동사니를 끌고 다니니 10살짜리가 안 울고 배겼을까? 그때 세상 화가 없는 우리 아빠는 설명서를 한참을 보더니 아무 말 없이 내가 망쳐놨던 부품들을 하나씩 다시 정리하고 다시 조립을 시작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 두었다. "우리 차근차근 다시 해볼까?" 그렇게 이틀에 걸쳐 아빠와 함께 멋들어진 비행기를 만들었다.


 어른이 된 나는 정신없고 마음만 바쁜 팀원들에게 항상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차근차근 적어보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우선순위가 결정하기 어려우면 내가 정해주겠다"라고 이야기했다. 별이야기 아니었지만 내가 너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표현이기도 하고, 주어진 업무를 나열하는 것부터 머릿속으로 정리가 시작되기 때문에 꽤나 잘 먹혔던 기억이 난다.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 아닐까? 정성스러운 말 한마디, 관심의 눈빛정도로 훈수만 둬도 일이 진행되던 시절은 지나갔다. 내가 곧 팀장이자 팀원이다. 10살 때처럼 아빠의 도움은 없다.


"무엇을 할지 차근차근 정리하고, 우선순위를 정해!"


한 걸음씩.


 나는 조직성장 전문가이자 강연자이다. 아직 아무도 불러주지 않지만 이렇게 나를 부르기로 했다. 나의 지난 경력들이 이를 증명하겠지만 이렇게 되면 구구절절 지난 업적을 언급하고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조직성장관점에서의 책을 먼저 내고 강연을 시작하는 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이미 내가 할 말을 정리하고 시작했다는 의미에서 더 큰 신뢰감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브런치에서는 개인사업자로 자리 잡아가는 과정만을 담고, 조직성장관점의 책은 '짜잔' 하고 전체를 완성하고 내놓을 작정이었다.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느끼는 것은 글마다 반응을 볼 수 있고 하나의 글을 집중해서 쓰고, 수정하고, 다시 완고하는 과정에서 완성도가 높아진다는 점이다. 이 점을 나는 활용해야 한다.


 한 권이라는 욕심을 버리고 한 챕터씩 차근차근 정리해 글을 쓸 작정이다. 아버지의 가르침이 그러했듯이 내가 그렇게 이야기했듯이. 에세이와 함께 써 내려갈 '팀장의 메모장' 도 기대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퇴사한 아빠의 좌충우돌 성장기 #가장 수여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