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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 Oct 13. 2020

엄마 치유

상처받은 어린시절의 기억을 안고사는 엄마들의 치유를 위하여

김경림 <나는 뻔뻔한 엄마가 되기로 했다>를 읽고


 영재 판정을 받고 당연히 행복한 꽃길만 걸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내 아이가 어느날 갑자기 희귀암에 걸린다면.

 이런 영화 같은 일은 이 책의 저자에게 실제로 벌어진 일이었다.

 저자의 큰 아이는 네 살에 한글을 읽고 여섯 살에 구구단을 외우던 영재였다. 부모도 명문대를 나왔고 경제적으로도 크게 부족하지 않으니 아이의 성공은 보장된 것이라고 생각하던 어느날 아이가 머리가 아프다며 식은땀을 흘렸다. 구토와 근육통을 호소하다 나중에는 한쪽눈까지 보이지 않게 되었고 그렇게 여러 병원을 돌아다니다가 받은 진단이 소아암이었다. 아이의 병명을 들었을 때 엄마의 마음이 어땠을지는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책을 읽는 내 눈에서도 하염없이 눈물이 나고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아이의 엄마는, 저자는 그렇게 시작된 아이의 투병생활 속에서 최선을 다해 ‘엄마’역할을 하였으며 거기서 얻은 배움을 이 책을 통해 나누어 주고 있었다.     

 나는 아이를 통해 내가 ‘좋은 엄마’, ‘훌륭한 엄마’ 임을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100점짜리 성적표를 받아서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이는 엄마가 하라니까, 엄마를 사랑하니까 엄마의 사랑을 잃고 싶지 않으니까 엄마가 하라는 대로 했다. 나는 아이의 그 지극한 사랑의 마음을 내 인생을 장식하는 장식품으로 사용했다. 아이가 죽을병에 걸리고서야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아이를 위한다고 했던 모든 일은 아이‘만’을 위한 게 아니었음을. 나는 한 번도 아이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았고, 아이가 원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음을. 

 

 많은 엄마들이 아이를 위한다는 명목아래 사실은 자신을 위하는 일을 아이에게 강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의 성적이 엄마의 성적이 되고, 아이의 대학 간판이 엄마 노릇을 얼마나 잘 했는지 보여주는 척도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아이를 위한다는 명분하에 슬그머니 엄마의 욕망이 스며든다. 그래서 부모 자신은 비록 보잘 것 없이 여겨질지라도 아이만큼은 열심히 공부를 시켜 출세의 길로 내보내고자 한다. 하지만 그런 부모의 욕구를 아이가 충족시키지 못하면 그때부터 갈등의 씨앗이 싹튼다. ‘이게 다 너를 위한 일이야’라는 말로 아이를 조종하려고 하는 순간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번진다. 따라서 부모는 이 싹이 더 커지기 전에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를 알아차려야 한다.


 나의 아버지는 우리나라에서 최고 명문대라고 불리는 S대를 나오신 분이었다. 아버지가 대학을 졸업하던 시기는 우리나라가 한창 경제발전을 이루던 시기이니만큼 좋은 학벌 하나만으로도 원하는 직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아버지는 사회생활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남에게 굽히기 싫어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불같은 아버지의 성격을 받아주는 회사는 많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는 회사에서 나와 사업을 시작했지만 이 또한 녹록치 않은 길이었고 결국 어머니가 실질적인 가장이 되었다. 그러나 회사에서 나왔다고 해서 출세하고 싶은 아버지의 욕구까지 꺾인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욕구를 자식의 공부와 성적을 통해 보상받고자 했다. 명문대 졸업장이 사회적인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몸소 경험했음에도 아버지는 자식들이 공부를 잘 하기를 원했다. 물론 자식이 공부를 잘 했으면 하는 마음이야 우리나라 대부분의 부모들이 가진 생각일 테지만 문제는 그런 아버지의 태도가 너무나 일방적이고 강압적이어서 오히려 더 큰 역효과를 불러왔다는 점이다. 소심하고 겁이 많은 나에게 어느덧 아버지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아무리 잘해도 칭찬받기 힘들고 더 잘하는 친구와 비교하는 아버지에게 내가 느끼는 감정은 분노, 원망, 무력감, 두려움 등이었다. 남들이 보는 나는 ‘모범생’이었지만, 정작 내 마음은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이 병이 치유되기 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만약 아이가 죽음의 문턱에 다녀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직도 ‘아이를 위해서’라는 이름으로 나의 무의식적 욕망을 충족시키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아이는 자신의 목숨을 걸어서 자신의 목숨을 지켰는지 모른다. 그러니 얼마나 다행인가. 나의 무의식적인 시도가 성공하지 못해서.

 

 자신의 목숨을 걸어 자신을 지킨 아이. 부모는 아이에게 생명을 부여하기도 하는 사람이지만 그릇된 부모의 무의식적 욕망은 아이의 영혼을 병들게 한다. 그래서 부모는 아이를 보기 전에 먼저 자신을 더 깊이 있게 만나야 할 것이다. 

 아이의 항암치료가 끝나자 저자의 가족은 서울 생활을 접고 지리산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아이는 여름에는 계곡에서 물장구를 치고, 겨울에는 눈사람을 만들며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냈다. 그렇지만 지리산으로 이사한 노력도 소용없이 아이는 재발했다. 저자는 이 때 깨달았다고 한다. 엄마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아이에게 닥치는 일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엄마는 아이의 인생을 좌우하는 강력한 힘을 행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가 제 운명을 감당할 때 그저 옆에 있어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어쩌면 아이는 부모에게 속해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다분히 독립적이고 평등한 존재 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부모는 아이가 자신의 삶이라는 무대에서 충실히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서포터일 뿐 아이가 만든 무대에 주연을 맡으려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부모는 부모자신의 무대에서 주연으로서의 역할을 다 하면 된다. 

 이 책은 내게 여러모로 위안이 되어준 책이다. 작가는 아이의 암투병을 통해 진짜 엄마로 성장한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이 경험하고 느낀 것을 진실하고 담담하게 책에 담아두었다. 나 역시도 아이들을 키우며 참으로 다양한 감정을 느꼈다. 그 감정 속에는 기쁨, 환희, 행복과 같은 즐거운 감정도 있지만 두려움, 불안, 죄책감과 같이 마주하고 싶지 않은 감정들도 함께 있었다. 과연 내가 아이들에게 엄마역할을 잘 하고 있는 것인지 몰라 불안했고 더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특히 죄책감은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는 감정이었다. 아이들의 엄마가 되기에 나는 너무 미성숙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예민하고 불안이 높아 별것 아닌 것에도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는 내 모습을 보면서 나는 늘 죄책감에 시달렸다. 큰애가 나처럼 불안이 높은 모습을 보일 때면 내가 아이를 너무 엄하게 키워서 예민한 아이로 만든 것 같아 걱정이 되었고, 둘째의 느린 행동을 볼 때면 바쁘고 귀찮다는 핑계로 책도 많이 읽어주지 못하고 경험도 많이 시켜주지 못해 그런 것은 아닌지 뒤늦은 자책과 후회를 하기도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런 나의 죄책감을 찬찬히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작가는 죄책감은 오만한 감정일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하였다. 죄책감 아래에는 사실 내가 혹은 아이가 완벽해야 한다는 욕망이 깔려있는 것이라고. 이 부분에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랬다. 어쩌면 이제까지 내가 불가능한 완벽함을 추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의 내면에는 엄마라면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해야 하고 절대 아이들에게 격한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틀이 만들어져 있었다. 아마 과거에 불같이 화를 내던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나도 싫어서 나는 절대 아이들에게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무의식적인 다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부모가 화를 낼 때 내가 느끼던 분노, 두려움, 불안감 등을 내 아이들이 경험하지 않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그 틀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지만 되려 그 틀은 나를 더욱 숨 막히게 만들었고 그 숨 막힌 감정들은 결국 화나 짜증이 되어 아이들에게 쏟아졌다. 그리고 나면 나는 또 죄책감과 후회, 자책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돌고 또 돌았다. 내가 진짜로 필요한 것은 틀에 맞는 완벽한 나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 틀을 넓혀 더 많은 상황을 편안하게 수용하는 것이었다. 화가 나는 감정을 꾹꾹 눌러도 아이들은 엄마가 화가 났다는 것을 다 안다. 그리고 그 순간에는 어떻게든 참았던 감정이 해소되지 않고 남아있으면 오히려 전혀 엉뚱한 순간에 아이에게 불똥이 튀어 아이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것이야 말로 내가 배웠던 최악의 양육방식이 아니던가. 아이의 똑같은 행동을 두고 부모가 지난번에는 허용해주고 이번에는 꾸중을 한다면 아이는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옳은지 몰라 혼란에 빠진다. 이러한 비 일관적인 양육방식이야말로 아이들에게 가장 좋지 못한 양육방식이라고 배웠다. 비 일관적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부모 마음대로 즉 ‘부모의 기분에 따라’ 모든 것이 좌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아이들은 당연히 부모의 눈치를 살피며 긴장할 수밖에 없다. 

 나의 죄책감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나 싶다. 내가 가장 싫어했던 부모님의 모습을 절대로 답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지만 똑같이 행동하는 나 자신을 용서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모든 감정을 완벽하게 컨트롤 하는 엄마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엄마가 로봇처럼 감정을 백퍼센트 컨트롤 한다고 아이에게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나는 불가능한 그리고 불필요한 완벽을 추구하며 아이들과 나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내 아이는 완벽한 아이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충분히 사랑스럽고, 소중한 아이입니다. 나도 완벽한 엄마는 아니지만, 내 아이의 엄마 정도는 될 수 있을 만큼 좋은 엄마입니다. 무엇보다도, 지금 아이 옆에 ‘엄마’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엄친아가 아니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내 아이를 가장 많이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우리아이의 엄마인 ‘나’일 것이다. 그리고 엄마가 미스코리아가 아니어도 엄마를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아이들일 것이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란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기 까지는 아직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하지만 더 이상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인생에서 완벽, 완성 이런 것들을 추구할수록 그것과의 거리는 오히려 더욱 더 멀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하루 그저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사랑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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