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omado Nov 24. 2024

걸음에도 생태계가 있다는 것

유럽인과 아시아인, 그리고 까마귀가 걷는 법



베를린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일본 문구류와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상점의 세일즈 직원으로 오래 일하다 관두던 때였다.


일본 기업의 직원으로 일 할 땐 아무리 이곳이 유럽이고, 그 유명한 독일일지라도, 노동자의 권리가 이만큼 저만큼이나 중요하더라도. 그 안에서만큼은 철저히 일본 회사의 문법을 따랐다. 손과 발이 바쁜 사람은 유능했으며, 멀티태스킹은 최고의 효율이었다. 보폭이 크고 속도감이 낮은 걸음은 게으름 뱅이의 걸음이라고 불리었고, 재고 종종하며 시간을 재촉하는 걸음은 특별하다고 여겨졌다. 그 박자감에 나또한 뒤쳐지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건 내가 나고 자란 곳에서도 익숙한 운율들이었으니까.


그러다 셰프의 '아시아적인' 무례한 농담에 더이상 웃어줄 수 없기 시작했을 무렵, 지난 1년 반동안 함께 어깨를 맞대고 울던 친구들을 그곳에 남겨두고 퇴사해야만했다.(해야만 했다는 것은, 내 안에서 타협할 수 없고 참을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란듯이 그 상점의 맞은편, 누가봐도 공들여 축조된, 하얀 빛이 사랑스럽고 볕이 잘드는 북유럽 상점 내 베지테리언 카페의 바리스타 자리를 금방 얻어냈다. 돌이켜보자면 스스로를 가장 자랑스럽게 여겼던 시기였던 듯 하다. 아시아의 구시대성을 버리고 북유럽의 현대성을 획득한 듯 의기양양 했다. (이건 편견으로 가득한 완전히 그릇된 말이다.)


베를린은 그런 곳이었다. 내 비자는 독일의 것이라 해도, 내가 있는 곳(그러니까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에 따라 그 곳이 일본일수도, 스웨덴일 수도 있는 곳이었다.




첫 출근 날이었다. 가장 깨끗하고 미니멀한 옷을 골라입었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 유동인구라면 손에 꼽히는 용산역에서 바리스타로 일했던 경험이 있으니, 그렇게 긴장되는 일은 아니었다. (혹은 아닌 척 했다.)  아무래도 첫날이니, 우선은 계산대에서 주문받는 일부터 시작했다. 대리석으로 된 계산대 앞에서 나는 마치 나 홀로 거인들의 세상으로 출장온 소인국 시민이 된 기분에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게 뭐야. 높고 거대하고 장엄한 계산대에 매달려 손님의 말을 간신히 듣는 기분이었다. 이 큰 대리석 상판 너머, 마치 손님이 바다 건너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직감했다. 여긴 독일도, 한국도, 일본도 아닌, 평균과 규격이라는 것이 애초에 내 데이터안에 없는, 진짜, 진짜 다른 세상이라는 것을.


이미 머릿속이 꼬이기 시작했지만, 누군가가 계산 모니터 화면에 포스트잇으로 적어놓은 'Keine Panik auf der Titanik'(타이타닉 안일지라도 당황하지 마세요)라는 운율 섞인 문구(파닉-티타닉 으로 흐르는)를 반복해서 되뇌었다. 고양이들은 어딘가 아플 때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도 골골송을 부른다던데, 그게 마치 딱 나였다.


마음이 급해지니 걸음도 급해졌다. 뭐라도 해야했다. 내가 여기서 나름 '바리스타 경력직'으로서 뽑혔단걸 내가 내 스스로에게 입증해야하는, 새로운 일터는 그렇게 갑자기 증명의 장이 되었다. 그래 내가 가지고 있는건, 눈치 잘 보는 걸음과 멀티 태스킹이다. 난 주문을 받고 손님이 카드를 꺼내 계산하는 동안 누구보다 빠르게 오트밀크로 만든 카푸치노를 만들 수 있고, 커피가 추출되는 시간동안을 아껴서 그 사이에 식기세척기도 돌릴 수 있지. 다시 커피머신으로 돌아오는 길엔 오븐에서 구워진 빵도 꺼낼 수 있는 사람이야. 그리고 실제로 난 그 모든 갖가지 일을 하나의 동선 안에서 해내었다.




"무슨 일을 하고싶은거야?"


커피 서빙까지 마치고 돌아왔을때 동료는 그렇게 물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무슨 실수를 했던가. 대답하지 못했다. 머릿속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나의 동선을 빠르게 점검했다.


"어떤 일을 선호해?"

"어떤 일을 할 때에 마음이 편하다고 느끼니? 주문을 받고싶어? 아니면 커피를 만들고싶어?"


동료가 질문을 친절히 다시 한번 풀어내준 덕에 깨달았다. 무슨 일을 하고 싶냐는 질문은, 네가 지금 일을 '잘못'하고 있다거나, '잘' 못하고 있다거나, 실수를 했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활자 그대로 무슨 일을 '하고 싶냐'는 물음인 것이다. 그것은 용산역에서부터 시작한 나의 알바 역사에선 받아본 적 없는 형태의 질문이었다. 내가 뭐가 하고싶은지가 중요하게 여겨질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혼자만이 바쁘게 움직이던 나를 잠깐 붙잡은 동료덕에 잠시 멈춰 주변을 둘러보았다. 각자 맡은 영역에 집중해 차분한 걸음을 걷고 있었다. 한명은 치아바타를 썰다가 일이 지겨워질 때 즈음엔 잠시 물을 마셔야겠다며 멈췄고, 한명은 식기세척기의 그릇만을 하루종일 잘 골라내고 있었다. 나머지 한명은 손님들이 짜증난 얼굴로 시계를 보며 한숨을 쉬어도, 홈카페에 온 듯 느긋하게 자기만의 템포로 플랫화이트와 마차라떼를 만들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호흡들로. 내 세상에선 '게으름뱅이'로 간주되온 걸음들로.


나의 홀로 '다-해내겠다'는 숨가쁜 걸음은, 그들이 맞춰둔 고요하고 평화로운 합에 굉음을 내고 있었다.




걸음에도 생태계가 있다는 사실을 집에 가서도 잘근잘근 곱씹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내가 모르는 종류의 걸음을 어떻게 걸으라는건지 도무지 모르겠는 것이다. 물고기인 내게 뭍 밖에 나와 숨을 쉬어보라는 말도 안되는 미션이 떨어진 것 같았다. 내가 이 곳에서 일하기엔 너무 '아시아'적일까?(이런 표현을 굉장히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왜 저렇게 게으르지? 저들은 내게 너무 유럽인이었다.(이런 표현을 굉장히 싫어한다)


내 역사를 내리친 그 돌덩이 같은 질문을 등에 메고 나는 첫날 이후에도 몇주간은 길을 잃었다.

길을 잃었다기보단 걸음을 잃은 듯한 기분이었다. 두려웠다. 아시아인처럼 보일까 두려워하며 자꾸 스스로를 아시아인으로서 항변했다. 3주차쯤 되었을까, 여느때처럼 내게 할당된 시프트가 끝난 후 빠르게 카페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집에 가고싶었다. 걷지 않아도 되는 침대에 눕고 싶었다.


그런 생각으로 집 앞 작은 신호등을 기다리던 참이었다. 빨간 불 파란 불은 개의치도 않는 까마귀가 신호 따위를 기다리는 내가 우습단 듯이 맞은 편에서 의기양앙하게 건너오고 있었다. 까마귀는 주변을 둘러보며 차가 없다는 걸 확인했다. 그러면 겁도 없이 천천히 걸었다. 여기가 차도건 인도건 어쩌라는 식이었다. 그러다 골목에서 튀어나온 자전거의 소리를 듣고는 갑자기 잰걸음과 총총 걸음을 섞어걸었다. 까마귀는 날지않고 자꾸만 박자를 바꿔가며 차도의 끝까지 걸었다.


일순간 모든게 웃겨졌다. 까마귀도 걸음을 골라걷는데, 난 내가 걷느니 못걷느니, 내가 아시아인이니 쟤네 유럽인이니. 골몰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 다음날, 숨을 고르듯 박자를 골라내었다. 난 어제 그 까마귀다. 난 까마귀로부터 배웠다. 되뇌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바쁜 척 하며 숨는대신, 자리에 멈춰 동료 걸음의 박자를 재보았다. 그래 저 박자라는거지. 그리고 계산대에서 식기세척기까지 걸어보며 속으로 그 박자를 세었다. 걸음을 늦추었다. 늦추면 늦춰질 수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배워내기 시작했다.


이 곳에서 내가 걷는 가쁜 속도는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 동선과 그 걸음이, 자신만의 호흡으로 걷고자하는 이들에게 일종의 재촉일 수 있었다. 내가 물 한모금 마실 수 있는 짬을 내지 않는 것이, 일터에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그들의 권리마저도 생채기 낼 수 있었다. 여긴 그런 생태계 속에 짜여진 팀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아시아적이고, 유럽적이고, 까마귀적인 것과 근본적으로 닿아있으면서도, 동시에 완전히 상관없는 고유한 생태계이기도 했다.


그 복합적인 환경을 이해하고서야 새로운 속도로 흐르는 베를린에서의 두번째 파트 타임이 시작되었다. 내게서도 인종과 문화와는 별개의, 새로운 숨과 걸음이 탄생했음을 예감했다.






목, 일 연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