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소한 변호사 Sep 05. 2024

앞을 보며 걷는 삶

- 삶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신뿐 -

놀라는 표정을 짓지 말자고 다짐하고 교도소에 갔지만 나는 속으로 꽤나 놀랐다. 기록에 26세로 나와 있는 상수는 초등학교 3~4학년 정도의 키와 체격이었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사람이 죄수복을 입고 있는 모습은 많이 어색했다. 나는 내색하지 않고 평소와 같이 사건 내용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상수는 한 맺힌 사람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은 초등학생이 아니라는 것을 강변하듯, 쓰지 않아도 될 어려운 단어나 법적 용어들을 마구잡이로 사용했다. 


상수는 '하이랜드 증후군'을 가지고 있었다. 성인이 되기 전 뼈와 근육의 성장이 멈춰 시간이 지나도 더 이상 육체가 자라지 않는 희귀병이다. 어렸을 때는 특별한 문제가 없었다. 학창 시절 그리고 대학생 때까지 상수는 반장을 하거나 과대표를 하는 등 오히려 앞장서서 사람들을 이끌기도 했고, 교우관계도 좋았다. 생활기록부에도 좋은 내용만이 가득했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 사회로 나온 이후부터가 문제였다. 상수는 어디에서든 초등학생으로 취급받았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당연하게도 반말을 쓰고, 초등학교 몇 학년이냐고 물어보는 일이 다반사였다. 상수가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을 보고 어린 학생이 그러면 안 된다고 훈계를 시작하여 시비가 붙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취업도 번번이 실패했다. 대학을 좋은 성적으로 졸업한 상수는 서류심사에서는 곧잘 통과했지만 면접을 통과하기가 어려웠다. 100번도 넘게 면접을 봤지만 모두 낙방이었다. 상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리는 자살시도까지 했다. 다행히 혼수상태에서 뇌수술을 받고 깨어났지만 수술 후유증으로 감정컨트롤이 더 어렵게 되었다.


그렇게 상수에게 희귀병은 점점 넘을 수 없는 인생의 걸림돌이 되어갔고, 상수도 변해갔다. 성인으로 보이기 위해 일부러 술을 더 많이 마시고 담배도 더 많이 폈다. 아이들은 쓰지 않을 법한 욕설이나 험한 말을 쓰거나,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잦아졌다. 누가 자신의 어려 보이는 모습을 오해하여 '학생'이라고 부르거나 반말로 이야기하면 마치 발작버튼을 눌린 듯 공격적으로 대응하다 폭행에까지 이르는 일이 반복되었다. 재판을 받게 된 사건도 모두 폭행, 협박, 상해 등이었는데, 모르는 사람들과 시비가 붙어 저지른 범행들이었다.


내가 본 상수는 마치 상처 입은 동물 같았다. 희귀병으로 인해 평생을 상처받고 깎여 나갔던 상수의 마음에는 미움과 분노만이 남았다. 이제 더 이상 상처받을 마음도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누군가 조금 다가오기만 해도 반사적으로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상처 입은 동물처럼, 상수는 본인을 도와주려고 다가오는 사람에게도 몸을 부풀리면서 화를 내고 공격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맡은 사건에서 상수는 자신의 범행을 모두 인정하고 있었다. 이런 경우 변호사 입장에서는 형을 줄여달라고 하는 양형변론만 하면 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간단한 사건이었다. 더구나 상수에게는 유사한 전과가 많았다. 기존 사건에서도 이미 상수는 희귀병과 관련된 주장을 하여 감형도 많이 받았고, 관련 자료들도 대부분 제출되어 있었다. 나는 기존 재판에서 이미 수차례 반복했었던 상수의 희귀병에 대한 변론을 길게 하는 대신 상수의 앞으로의 삶에 집중해서 변론해 보기로 했다. 판사도 상수의 재범가능성에 주목할 가능성이 높고, 아직 젊은 상수의 인생을 위해서라도 지나간 삶에 집중하는 것보다는 앞으로의 삶에 집중하는 것이 나아 보였기 때문이다.


"상수씨, 앞으로 하고 싶은 일 있으세요?"

"사실 좀 막막해요. 아무리 이력서를 제출하고 면접을 봐도 매번 떨어지니까요."

"구체적이지 않더라도 어떤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으세요?"

"나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며 살고 싶다는 생각은 해 봤어요."

"그럼 다른 사람을 도와주며 살 수 있는 직업이 뭐가 있을까요?"

"상담사나 성직자?"

"그럼 그런 쪽으로 한번 구체적 계획을 세워보는 건 어떠세요? 저도 한번 알아볼게요."


나는 첫 접견에서는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고 일단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다음 접견 전 상수는 스스로 반성문을 법원에 제출했다. 법원에서 반성문을 복사해 보니, 이번에 출소하게 되면 상담사나 성직자가 되어 다시는 죄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적혀 있었다. 아직 세부적인 계획을 세우지는 못한 것 같았지만, 나의 마음도 한결 좋아졌다. 목표가 있는 사람은 주위 사정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니, 구체적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나가다 보면 상수의 상처도 조금씩 치유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다음 접견은 상수의 앞으로 계획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냈다. 상수는 계획을 세우고 앞으로의 미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즐거운 듯 신난 모습이었다. 굳이 어려운 단어나 법적 용어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마지막 재판 날 상수는 판사 앞에서 꽤나 길게 최종진술을 했다. 재판결과를 떠나 이번에 출소하게 되면 성직자나 상담사가 되어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며 살겠다는 상수의 말을, 적어도 나는 진지하고 무겁게 받아들였다.


판결이 선고되고 몇 달이 흘렀다. 나는 상수를 잊고 있었다. 그런데 교도소 접견을 갔다 돌아오는 길, 낯익은 실루엣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상수였다. 상수는 교도소 정문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확성기를 든 채 1인 시위를 하고 있었다. '인권침해', '교도관 처벌' 등의 말이 들렸다. 그러고 보니 문득 상수가 접견 중 했던 말이 떠올랐다. 교도관 중 한 명이 "엄마아빠도 너랑 같은 병이냐?"라고 물어봤는데 이건 인권침해 아니냐고 화를 냈었다. 아마도 교도소에서 출소 후 이에 대하여 진정을 냈는데, 아무 처벌이 없자 교도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상수가 부디 앞으로의 삶에 집중하기를 바랐는데, 상수는 여전히 뒤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실망감에 아는 척도 하지 않고 조용히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러고 또 몇 달 후, 내 사무실 책상에 놓여 있는 사건 기록에 낯익은 이름이 보였다. 가슴이 철령 내려앉았다. 동명이인이 아닐까 기대를 했지만 아니었다. 상수였다. 이번에는 경찰서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다가 경찰관을 폭행하여 공무집행방해로 기소된 것이었다. 1인 시위의 이유는 편의점 앞에서 술을 마시던 상수를 누가 초등학생이 술을 마신다고 신고했고, 출동한 경찰관이 상수가 성인임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반말을 하는 등 인권침해를 했다는 이유였다. 상수는 다시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악순환 속에 빠지고 말았다. 덩달아 나도 길을 잃고 말았다. 몇 번의 접견만으로 상수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기대와 다른 상수의 모습에 실망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재판 과정에서 잠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국선변호사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을까?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자신 뿐임이 너무도 당연한 것을...


다시 만난 상수는 처음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여전히 어울리지 않는 어려운 말을 사용했고, 세상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성직자나 상담사를 해 보기로 하지 않았냐는 물음에 그것도 알아보니 쉬운 게 아니더라고 대답했다. 세상에 쉬운 것이 어디 있겠냐만, 선천적 희귀병으로 인해 노력으로 안 되는 일이 있음을 진작에 알아버린 상수에게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으리라.


이번에는 변론도 길을 잃고 말았다. 선천적 희귀병에 대한 주장도, 앞으로의 새로운 삶에 대한 주장도 의미가 없게 느껴졌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주장과 변론은 다 했지만, 오히려 알맹이 없이 겉돌기만 한 것 같이 허무했다.


이후 다행히 상수를 피고인으로 다시 만나지는 않았다. 그것이 상수가 다시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잘 살아가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우연히 나에게 상수의 사건이 오지 않았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부디 상수가 뒤만 보다가 자꾸 걸려 넘어지는 삶을 살고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뒤가 아닌 앞을 보며 살아가고 있기를,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자신을 바꾸어 자신만의 인생을 살고 있기를 바라본다. 더 나아가 어느 교회에서 목사가 되어 사람들에게 자신의 지난 경험을 이야기하며 용기를 주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일까?

매거진의 이전글 범죄자의 진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단 한 사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