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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nto Mar 17. 2022

세상의 끝

피니스테레 - Finisterre

세상의 끝이라고 불리는 곳들이 존재한다. 서로 남극과 더 가깝다고 말하며 세상의 끝을 주장하는 아르헨티나의 우수아이아와 칠레의 푼토 데 아레나스, 아프리카의 최남단이라 여겨지며 세상의 끝 중 하나로 불렸던 희망봉, 북해와 발트해가 만나는 현상 때문에 주민들이 스스로 끝이라 부르는 덴마크의 스카겐, 유럽의 최서단인 까보 다 로까(호카곶) 등.


나에게 세상의 끝을 봤냐고 물어본다면,
피니스테레에서 봤다고 이야기하겠다.




프랑스 생장에서 시작되는 프랑스의 길. 수많은 까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한국명:산티아고 순례길) 중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그 길의 끝 역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서 끝난다. 그로부터 9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피니스테레는 하나의 연장선으로 여겨질 뿐인 곳이라, 수많은 순례자들 중 대부분 걸어서 도달하지 않는 곳이다.



걷지 않을 이유가 없었기에 걸었던 약 800km의 길 끝에서 만난 산티아고 성당은, 생각보다 큰 감흥을 주질 못했다. 사진을 찍고, 얼싸안고, 키스를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약간은 어정쩡한 미소 짓고 있었던 나는, 길을 걸으며 거쳐왔던 마을 중 하나를 지나가듯, 금방 떠나 다시 걸었다.



산티아고 성당까지 같이 걸었던 순례자들이 거의 사라지고, 몇 명 남지 않은 순례자들만이 남은 그 길 위에서, 또 다른 일행들을 만났다. 어느 순간 6명의 사람들이 같이 걷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한국에서 온 커플이 있었다. 캠퍼스 커플이었던 그들 중, 여자 쪽은 걷던 중 다리를 접질려 불편한 상황이었고, 남자 쪽이 피니스테레까지 가고 싶다는 욕심에 약간은 무리를 해서 걸음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서로 챙기고, 걱정하고, 보살피며 걷는 그 커플 옆에서 우리 역시 그들의 속도에 맞춰 함께 걸었다. 급할 건 없었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이 길의 끝에서 흩어질 테니까. 인연은 소중하되, 그 느슨한 연대가 깊어지지는 않길 바라기에 수다만을 떨며 함께 걸었다.



그리고 산티아고 성당으로부터 출발한 지 4일째 되는 날 나타난, 조금은 가팔랐던 산봉우리의 꼭대기에서,


날 여기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


우리는 바다를 보았다.



여자가 남자에게 말했던 고맙다는 말이 잊히질 않는다. 900km를 걸어왔던 그 산 위에서 우리는 그 말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바다가 눈에 보이는 순간 조용히 흘러나왔던 그 말에, 어느 누구도 대성통곡을 하진 않았지만, 땀범벅인 얼굴임에도 다들 선명하게 눈물자국이 남았다. 이보다 더 큰 경이는 없다는 듯이. 세상의 끝을 보았다는 듯이.




피니스테레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자신들이 지니고 왔던, 물건들을 태운다. 신발을 태우는 사람도 있고, 가방을, 담요를, 침낭을 태우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묵시아(Muxia)를 거쳐 다시 산티아고 성당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시작하기에 짐을 태울 수 없었고, 걸어온 순례자들의 시선 속에서 어깨까지 내려온 머리카락을 잘라서 태웠다.



무딘 칼로 뜯어내듯이 잘라 냈던 머리카락의 탄내를 맡으며, 확신할 수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 까미노의 여정은 여기서 끝이라고. 돌아가는 길도 남아있었고, 언젠가 다시 돌아와 걸을지도 모르겠지만,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는 시점은, 지금이라고.



ⓒ photo by jacqueline macou on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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