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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nto May 02. 2023

가장 단단한 사람

[사람 #06] H의 이야기

H는 처음보기에 너무나도 평범한 사람이었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대학생. 성격은 둥글둥글하고, 생긴 것도 둥글둥글하고, 생각하는 것도 둥글둥글함. I가 H에게 느낀 첫인상이었다. 특히 I는 남아메리카를 돌아보다 학교로 복학한 직후였고, H는 군대에서 돌아온 직후였기 때문에, 계속해서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는 I에게 있어, H는 전혀 특별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어찌어찌 연이 되어 H와 프로젝트를 같이하게 되었다. H와 I가 직접적으로 이름을 올리는 프로젝트가 아니었음에도, 둘은 미친 듯이 그 프로젝트를 도왔고, 거기서 I는 H의 단단함을 처음 발견하게 된다.



H의 무난함이 단단함이었을 줄이야.



어떠한 요구사항도, 말도 안 되는 상황에도 H는 중심을 잃지 않았고, 사소한 것에도 흔들리는 I를 지탱해 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분명 H가 I보다 두 살 어린 동생이었음에도, H는 훨씬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I의 옆에 있었다.



사람의 연이란 것은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은, H와 I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둘은 그 후에 서로의 졸업 작품을 돕는 사이가 되었고, H의 방에 I가 기거(라고 쓰고 빈대 붙는다 말한다)했으며, ABC 트랙킹을 같이하고, 꼬따오의 바닷속을 공유했다. I의 유리멘탈이 바스러져서 몇 달 잠수를 탔을 때에도, 그의 집에서 칩거했었고, 후에 어떠한 일이 터질 때마다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쉽게 끊어질 연이라 생각했는데, 질기도록 살아남아, 졸업 후에도 끊임없이 생각과 시간을 공유하는 상황이 되었다.



I는 H에게 일방적으로 의지하는 존재였다.

만약 남녀 간이었다면,
어떻게 저럴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건전하지 않은 연인사이.


I가 H를 옛날부터 알고 있었고, 새로운 I가 나타나서 H를 괴롭혔다면, 제발 그 사람을 끊어내라고 부를 관계였다. 하지만 I의 질김이 더 강했던 것일까? H는 I를 쳐내지 않았고, I는 H로부터 떨어져 나가질 않았다.



H는 레바논으로 파병을 갔다 왔다. H는 파주 산골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며, 농사도 짓는다. 학교에서는 평범하지만 우수한 학생으로 평가받으며, 여전히 동기들과 수 없이 연락을 하며 지낸다. 학생 때 돈을 벌기 위해서 인천공항을 짓는 노동자로 참여했었고, 지금도 시공에 더 큰 매력을 느껴 소규모 건설사의 현장소장으로 고급주택을 짓는 일에 참여한다. 회사를 옮겼음에도, 전 회사에서  끊임없이 연락이 와서 도움을 준다. 운전을 잘하고 운동을 끊임없이 유지하며 할 줄 안다. 아침 6시에 일어나는 게 습관이 되어있어 새 나라의 어린이처럼 일찍 잔다. 유흥에는 관심도 없고 게임에는 관심이 있다. 요즘은 어항을 돌보는데 온 힘을 다하고, 늦게나마 요리에 취미를 갖기 시작해 온갖 주방용품을 사 모으기 시작하는 중이다.



2021년 I의 멘탈이 한 번 더 부서졌을 때, H는 I를 찾아와 함께 있어줬다(물론, 독설과 함께). 그리고 재미로 보자며 사주카페를 찾아갔더랬다(I에게 있어서는 재미를 빙자한 진지함이 있었지만). 사주를 봐주시는 선생님은 H에게 늦가을의 나무 같은 사람이라 했다. 뿌리가 튼실하고, 저장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 모든 걸 낙엽으로 덮어줄 줄 알고, 어떤 일을 하더라도 본질에 충실하여 모든 사람들이 찾는 사람. 이보다 더 좋은 친구가 있을까.



평범하게 느껴지는 사람인가.

하지만 세상에 특별하고 좋은 사람이란,
그가 해 왔던 특이한 경험으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다.


그 자체의 본질로, 누군가들을 감화시킬 수 있다면, 이미 매우 특별한 사람이다. H가 그 점을 알려줬기에, I는 더욱이 좋은 사람들을 계속해서 만날 수 있었고, 연을 쉽게 끊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아마 세상에는 H 같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특별함을 드러내지 않은 채, 그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친구들. 만약 이와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친구로든 연인으로든 붙잡아라. 평범함으로 가장하고 있지만 그보다 매력적인 사람들은 없다. 그들은 우리가 손을 내밀 때 언제나 붙잡아줄 것이며, 우리가 힘들 때 찾아올 것이다. 특별한 위로도, 공감도 못해줄 수 있으니, 존재만으로 든든함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20대의 I처럼 그들을 못 본채 지나갈 확률도 높다. 그들은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깔끔하고 흔들리지 않기에, 붙잡지 않으면 흘러가버린다.


이 글은 그런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라며 남기는 짧은 고백이다.




PS. 여전히 난 너에게 존댓말을 쓰지만, 이 공간에서 만큼은 말을 놓는다. '고마워요'란 표현보다는 '고맙다'라고 말하고 싶어서. 그리고 앞으로도 고마울 것이라고 남겨놓기 위해서. 더더욱 내 옆에 붙잡아두기 위하여 '고맙다'란 말을 달고 살 거야. 알겠지만 난 철저하게 편이를 추구하는 사람이잖아.


네가 원하는 일이 있다면 시간이 걸려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줄게. 알겠지만 난 그런 쪽으로는 꽤 능력이 있는 재수 없는 사람이기에, 나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 바라. 그 바람이 나를 더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니까 걱정하지 말고.



Marc Zakharovich Chagall, 'Self portrait',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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