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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팔 May 22. 2023

요리의 진실


“당근은 어슷썰기로 하시고, 대파는 송송 썰어주세요.”

시범을 보이는 강사의 손놀림이 현란하다. 도마에 부딪히는 칼날이 일정한 리듬으로 소리를 내자, 채소가 반듯하게 썰려 나갔다. 어슷썰기가 뭐야? 아, 저렇게 써는 거. 교재에다 타원형을 그려 넣는다. 송송 썰기는? 단어 밑에 동그라미를 그린다.

“이렇게 해서 놔주시고 그다음에 해야 될 건....”

이미 교재의 빈 곳은 메모로 꽉 차버렸지만, 강사의 설명은 끝날 줄 모른다.

아니, 요리 하나 만드는데 뭐가 이리 복잡해. 벌써 지쳐 몰맨 소리를 내며 주위의 수강생들을 살펴본다. 모두 강사의 말 토씨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하고 있다.

“아, 참, 그리고 칼을 잡을 땐 손잡이를 이렇게 잡고 칼등에다 손가락을....”

칼 사용법을 설명하자 마치 무협지 속 한 장면 같은, 강호의 고수를 스승으로 모신 제자들처럼 매의 눈초리로 칼 놀림 하나하나를 진지하게 살펴본다. 여성들은 연령대가 다양한 듯 보였으나 나를 포함한 몇 안 되는 남자들은 비슷한 연배 같았다. 튀어나온 배에다 앞치마를 두른 모습 만큼은 영낙없는 주방장이었다. 나와 같은 처지로 나왔을까?


“당신도 할 줄 아는 게 좀 있어야지. 내가 이렇게 아프고 힘들면 누가 해 줄 건데?”

남편을 걱정하는 건지, 자기가 못 먹을까 봐 걱정하는지 잠시 헛갈리자, “이젠 나도 몸이 예전 같지 않아. 못 할 거 같아.” 힘없이 얘기하는 아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나이 탓인지 요즘 들어 아내는 부쩍 잔병치레가 많아지고, 누워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힘들어했다. 주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꾸준히 해 온 설거지 외에 라면 끓이기, 계란프라이, 음식 데우기 정도고 조금 고난도 작업이라면 토스트 만들어 먹는 수준이었다. 정년퇴임 후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삼식이가 되면서 아내가 만들어 논 반찬들은 순식간에 거덜이 났다. 물론 내가 백수 주제에 밥까지 차려달라고 하는 파렴치한은 아니다. 직접 챙겨 먹는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식탁 위에 오르는 모든 음식의 창조주는 아내이다 보니, 그 전지전능한 힘의 혜택을 입고 살아온 나로서는 아내의 은퇴 선언은 식생활에 치명적이었다. 결국 자립을 위해 선택한 길이 요리 수업이었다.     


“자, 아시겠죠? 이제 제자리로 가서 실습 해 보세요.” 어느새 강사 앞에는 빛깔 좋은 요리 하나가 뚝딱 만들어졌다,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에 놓쳐버렸다. 불안해하면서 양념을 챙기기 위해 빈 그릇과 계량스푼을 들고 줄을 섰다. 채소, 달걀, 고춧가루, 다진 마늘, 다진 생강... 차례대로 정해진 분량만큼 담는다. 

 “어떤 게 마늘이고 어떤 게 생강이지?” 내 앞에 서 있던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내가 다져 논 마늘과 생강 통 앞에서 중얼거렸다.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코를 양념 앞에 갔다 대고 끙끙거린다.

에이~ 씨, 왜 더럽게 콧구멍을 들이밀고 그래. 자기만 쓰나. 저러다 코딱지라도 떨어지면 어쩌려고. 다음 차례가 난데. 뒤에서 씩씩거리고 있다가,

“이쪽에 있는 게 다진 마늘 일 겁니다.” 보다 못해 내가 아는 척을 하자, 사내는 멋쩍은 듯 고개를 끄덕이고 얼른 담아간다.


준비된 재료를 펼쳐놓고 뭐부터 해야 할지 빼곡히 적어 논 교재를 다시 들여다본다. 시작 전부터 순서가 헛갈린다. 일단 채소를 손보는 게 쉬울 것 같아 씻어서 다듬는다. 엉성하지만 어슷썰기와 송송 썰기 비슷하게 칼질해 접시에 가지런히 담아놓으니 제법 그럴싸한 모양에 뿌듯해한다.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양파를 넣자 익숙한 소리가 난다. 찌직. 아내가 주방에서 뭔가를 볶을 때 나는 소리였다. 내가 그런 음식을 만들고 있다는 게 어색하면서도 신기했다. 뒤집개로 양파를 휘젓자 특유의 향이 코를 자극하면서 눈물이 팽 돌았다. 이런.

“양파 향이 꽤 자극적이죠.” 내 표정이 재미있는지 맞은편에서 칼질하던 아줌마가 웃으며 말을 건다. 세련돼 보이는 중년여성이었다.


요리를 배우려는 사람들의 부류는 두 가지일 가능성이 크다. 직업으로 삼기 위해 자격증을 따려는 생계형과 소일거리나 재미로 배우려는 취미형. 나는... 굳이 따진다면 반반이다. 물론 아내의 엄포성 가까운 발언으로 반강제적으로 다니기는 하지만, 요즘 요리를 잘하는 남자들이 하도 많아 요리 모르면 간첩은 아니더라도 간첩으로 의심받을 거 같아 시작한 것이기도 했다. 이 여성도 외모로 봐선 취미로 하는 부류에 속할 듯 보였지만.... 아니다. 손놀림이나 칼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도마 위에서 바람을 가르는 칼이 춤을 추는 듯했다.  

“하시는 걸 보니 요리가 처음이신 것 같지 않아 보이는데....” 살짝 떠보는 질문을 던지자, 부드럽게 재료를 손질하면서 대답한다. 

“사실 저는 예전에 한식, 양식 자격증을 땄었어요. 근데 이것저것 자꾸 해보고 싶어서... 이제 중식을 좀 해볼까 하구 있어요.” 손이 할 말을 입이 대신하고 있었다.   

헉! 이 아줌마 도장 깨기 하러 다니는 거 아녀? 사람 기죽여 놓네. 속내는 그다지 좋지 않았으나 짧은 감탄사를 해주고 내 작업에 집중한다.


1시간 반이 빠르게 지나갔다. 허겁지겁 만들다 보니 순서는 이미 어디다 말아먹었고, 그저 완성하기에 급급한다. 파팍!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붓자마자 갑자기 물방울이 튀며 싸한 냄새가 진동한다. 앗 뜨거!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난다. 식용유하고 ‘식’자 밖에는 연관이 하나도 없는 식초를 들이부은 것이다. 똑같은 병 4개에 간장, 식용유, 식초, 참기름을 들어있는데 서두르다 병을 잘못 잡았다. 앞의 아줌마가 불꽃 쇼라도 구경하는 또 웃는다.

자기는 뭐 태어날 때 국자라도 들고 나왔나. 초짜가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구시렁거리며 프라이팬을 닦는다.


“자, 다 하셨으면 다음 요리 준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두 가지 요리하는 과정이라 수강생들이 찌개를 국으로 만들든, 구이를 조림으로 하던 강사는 크게 개의치 않고 진행을 계속한다. 서둘러 만든 음식을 아내가 챙겨준 용기에 옮겨 담고, 다음 요리 준비를 위해 도마와 칼, 그릇을 씻어 주변을 정리하는데 뭔가가 담긴 그릇이 눈에 들어온다.

아니 이게 왜 여깄어? 냉동 해물을 녹이려고 한쪽에 놓아둔 그릇이었다. 언제 넣으라고 했지?’ 한참 전에 자기 역할을 수행했어야 할 재료가 뒤늦게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 머릿속을 리와인드 시켜 순서를 기억해 내자, 몇 단계 전에 넣고 버무려야 할 때를 놓쳐버린 것이다.

어떡하지. 지금 넣어도 되는 건가? 버릴 수도 없고. 에잇, 모르겠다. 앞의 아줌마가 보기 전에 얼른 만든 음식 위에 부어버리고 용기 뚜껑을 닫는다. 그렇게 최초의 요리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파김치가 앞으로 만들 음식 목록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든다면 내 몸을 그대로 담가도 될 만큼 파김치가 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요리할 땐 집중하느라 느끼지 못했던 피곤함이 몰려왔다. 3시간 정도의 작업이었지만 종일 일한 강도 이상으로 힘든 중노동이었다. 예전에 모 배우의 수상소감으로 유명했던 말이 생각났다. 자기는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혀 거저먹었을 뿐이라는. 매일 주방에 몇 시간씩 서서 일하는 아내가 해준 음식을 숟가락 하나 얹혀 당연한 듯 먹어 치우는, 그것도 몇 시간 공들여 한 걸 20분도 안 되는 식사 시간으로 뚝딱 해치워 버리고 일어나버렸으니 만든 사람은 얼마나 허탈할까. 물론 가끔은 맛있다는 말 한마디 거들어 주지만, 직접 체험해보니 그렇게 싸구려 멘트로 인정해주는 게 민망할 정도로 반찬이나 요리가 얼마나 힘든 작업인지를 알게 된다. 해주는 음식을, 아무리 빈약한 반찬이 올라와도 군말 없이 먹어주는 차원이 아니라 극찬을 해가며 먹어주는 게 도리요, 의무라는 사명감을 느끼게 된다.  


"맛있어. 잘했네!" 해온 음식을 시식하는 아내의 평가에 선착순 사은품 증정이 내 번호에서 마감된 것처럼 안도한다. 전문가의 칭찬이라 당연히 기뻐해야 하지만, 한편으론 아내의 속내를 읽는 내 심정은 복잡했다. 여차하면 앞치마의 주인이 바뀌는 게 아닌가 싶었다. 설마 그럴 리야 있겠는가 자위하면서도 아내의 건강이 계속 좋지 않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 아닌가하고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 있는 순간 깜짝 놀란다. 그런 내 얼굴을 아내가 빤히 보고 있는 게 아닌가. 마치 내 수를 읽고 있는 것처럼.

"요리 쉽지 않지? 내가 얼마나 힘들게 가족들 해 먹이는지 이제 알았지?“ 엥겔지수가 높은 이 집에서 자신이 얼마나 절대적인 존재인지 아내는 은연중 드러낸다. 

“다 배우고 나면, 내가 그동안 해 온 요리, 반찬 다 전수해 줄게 기대하고 있어." 가벼운 미소가 번진 아내의 얼굴이 갑자기 무섭게 느껴졌다. 뭔가 잘못됐다. 이게 아닌데. 난 그저 비상 상황 시 써먹으려고 배우는 것뿐인데...

"왜? 싫어? 나를 위해 그 정도도 못해?" 아내의 재촉에 머뭇거렸다.

"아니... 뭐.. 싫은 게 아니구..."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음식을 그릇에 옮겨 놓으려고 시늉한다. 내 표정이 안 좋아지는 걸 봤는지,

"농담이다, 농담.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해. 어떡하겠어. 쓰러지더라도 내가 해야지." 아내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남편이 해 온 음식을 맛있게 먹는다. 아무래도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는 패는 내가 쥐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타협점을 모색한다. "당신, 아무래도 보약을 좀 먹어야겠어. 내일 한의원에 가보자구."

"무슨 보약씩이나... 좀 쉬면 낫겠지." 명확한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슬며시 방으로 들어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맞아. 내가 요리를 배우느니 차라리 마누라 건강을 회복시켜주는 게 더 빠르고 편하겠지. 돈은 좀 써야겠지만 힘들게 음식을 매일 어떻게 해. 그편이 백배 더 난 거야. 그제야 나도 안도하고 남은 음식을 싸서 냉장고에 넣고 문을 닫는다. 그때였다. 아내가 방금 살짝 미소 띤 얼굴로 사라지는 모습을 떠올리자 뭔가로 뒤통수를 맞은 듯했다. 순간 아내가 했던 말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요리 쉽지 않지? 내가 얼마나 힘들게 가족들 해 먹이는지 이제 알았지?“ 

“다 배우고 나면, 내가 그동안 해 온 요리, 반찬 다 전수해 줄게 기대하고 있어." 

“어떡하겠어. 쓰러지더라도 내가 해야지.”

그리고 틀리지 않을 예감이 엄습해 오고 있었다, 어쩌면 아내는 내 입에서 자신이 원하는 답을 가져간 것인지 모른다는. 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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