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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팔 Jul 04. 2021

찌질한 눈물의 행복

부쩍 눈물이 많아졌다. 나이 탓으로 돌리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있긴 하지만 흘리는 눈물의 질을 따져보면 예사롭지 않다. 오페라 <사랑의 묘약>에 나오는 아리아 ‘남몰래 흐르는 눈물’처럼 서정적이고 밀도 있는 눈물이라면 나름 환영할 만하다. 문제는 시도 때도 없이 쏟아내 경박스럽기까지 한 눈물이라는 거다. 드라마만 봤다면 티슈 반이 날아갈 정도로 온몸의 수분을 눈물로 다 빼버리는 아내가 한심스러웠다. 요즘 내가 그 짝이 났다.

TV를 보다가 흘리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애잔한 음악을 듣거나 조금만 눈물샘을 자극하는 이야기를 들어도 앞이 흐려지기 일쑤다. 아내와 같이 볼 땐 누가 먼저 티슈 통을 잡을 건지 내기라도 하는 것 같다. 그래도 남자라고 티를 안 내려고 꾹 참고 있다가 나보다 먼저 훌쩍이는 아내를 보고 괜히 한소리 타박하는데.... 말이 잘 안 나온다. 억지로 참은 눈물 대신 목이 메어 버렸다. 인위적인 감정 조절이 일으키는 내적 부작용이다. 이럴 땐 화장실이라도 가는 시늉으로 슬그머니 일어나면서 얼른 손으로 촉촉해진 눈가를 슬쩍 스쳐준다.  

왕가위 영화 <중경삼림>에는 사랑을 잃은 남자가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이런 독백으로 추스른다.

“실연당한 후 달리기를 시작했다. 한참을 정신없이 달리다 보면 땀이 흐른다. 수분이 다 빠져나가 버리면 눈물이 나오지 않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젠장! 더 눈물 나는 얘기다.


나의 이런 증상에 아내는 갱년기라는 진단을 내린다. 나이가 들면 남성들은 아담 증후군이 생긴다고 한다. 남성 호르몬이 줄면서 상대적으로 여성호르몬 분비 비율이 높아진다는 얘기다. 마치 이성이라는 남자애가 감성이라는 여자애로 바뀌어 버린 것처럼 말이다. 꼭 눈물이 아니더라도 나이가 들수록 감정이입에서 점점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다 보니 이성적인 판단보다 순간적 감정이 먼저 치고 들어올 때가 많다. “감정이 그 사람의 나이다”라는 글을 읽는 적이 있다. 하늘 뜻을 깨달을 나이(지천명)가 한참 전에 넘어서도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세상 유혹도 못 이기는 불혹의 세대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 젊다는 걸까 아직 철이 들지 않았다는 걸까?


극작가인 베르톨드 브레히트 이론 중에 <소격효과>라는 개념이 있다. 연극 용어로 관객과 배우의 심리적인 거리를 뜻하는데 연극을 보는 관객은 그 연극에 완전히 몰입해 빠져 있으면 안 되며 객관적인 입장으로 연극을 봐야 한다는 의미다. 쉽게 얘기해 재미있는 영화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는 동안 우리의 사고가 정지된다는 것인데, 이런 감정이입과 같은 '몰입의 위험성'으로 부터 벗어나 극중 인물과 거리를 두고 비판하게 한다는 얘기다.

어릴 적 김일 레슬링을 보던 시절이 떠오른다. 늘 그렇듯 한참 얻어터지고 있던 김일은 전세를 역전 시킬 수 있는 유일한 카드인 박치기를 꺼낸다. 그 한방으로 상대방이 나가떨어지자 나도 모르게 일어나 한층 업그레이드된 감정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아버지가 옆에서 한 말씀 거드신다.

“저거 순전히 쇼다. 가짜로, 짜고 하는 거라구!”

(....띠용!!) 이번엔 내가 나자빠진다.

박제돼버린 듯 나는 굳어버린 표정으로 멍하니 여전히 그 아름다운 박치기를 감상하고 있었지만 이미 감정적인 동화는 여지없이 무너지면서 그렇게 요동치던 감흥은 온데간데없어져 버렸다. 소격효과로 인해 깨닫게 되는 그야말로 비참한 본질이다. 이후로는 레슬링을 볼 때마다 김일 이마에서 나는 피의 정체와 성분 분석에 더 열을 올리곤 했고, 그때 충격과 실망감으로 올림픽 레슬링조차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보였다.

아내의 말처럼 갱년기 증상이든 감성적 도발이든 쏟아내는 감정 또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겠으나, 갈수록 이성이라는 큰 바위에 눌려 있기보다는 감성이라는 조약돌을 맞는 것이 가슴을 덜 아프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감정은 삶이 내는 소리이다. 그 울림을 통해 고통을 내뱉고 기쁨을 수확한다. 어떤 감정의 경계에서 그것을 삼키지 않고 오롯이 드러내 보임으로써 살아있는 생의 순간들에 반응하는 내 몸을 느낀다. 그런 일차원적 본능을 확인할 뿐 아니라 아직 사라지지 않은 감수성에 안도하게 된다. 감정은 늘 내 가슴속 요동치는 옹이를 받아 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관계라는 틀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들어내야 하는 조건반사 같은 가공된 에너지의 분출과는 달리 미적 감성으로 배태된 감정들은 나를 정화해주고 제자리에 있게 해준다. 그래서 늘 소중하고 그립다. 언제 갑자기 이런 감정, 느낌들이 사라져 버릴지 때론 두렵기도 하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흘릴 눈물마저도 메말라 버리는 건 아닌지... 남이 보기에 너무 질퍽거리거나 주책없는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면, 가끔은 이성적 절제보다는 감성적 파격이 건조한 삶의 힐링 역할을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왕 흘릴 눈물이라면 리히텐슈타인 그림처럼 교감신경을 자극하는 흥분은 덜하고, 수분도 많고 염화나트륨 성분이 적은 <행복한 눈물>이었으면 더 좋겠다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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