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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삐 Apr 15. 2024

어쩌다 마주친 그대.

봄날의 가운데서도 나의 우울은 여전합니다.

봄날의 한가운데, 겨울의 우울하기만 했던 먹구름은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낮게만 불어오던 찬바람은 이제 온풍이 되어 사람들의 머리를 스치듯 지나가죠. 이 회색빛 도시의 잔재들을, 바닷가 모래알처럼 반짝이게 변화시킨 것도 이 봄바람일 텝니다. 벚꽃 나무 밑의 영원을 약속하는 커플들의 발걸음이 가볍게 보입니다.

     

오랜만에 경포호수를 걸었습니다. 몸은 무거웠지만 마음은 바람에 날아갈 것만 같은 빨랫줄에 걸린 하얀 침대시트 같았죠. 아슬아슬했어요. 모든 것이 소생하는 이 따뜻한 계절에도 나의 우울은 침잠합니다.

  

이게 다 당신들 때문입니다. 사실 거짓말입니다. 축제의 들뜬 분위기, 머리 위의 햇살 탓입니다. 하지만 결코 바라지 않았던 모습이었습니다. 흩날리는 벚꽃에 탄성을 자아내는 군중들 속에서, 나는 엄마 손을 놓친 아이처럼 어쩔 줄 모른 채 두터운 겨울 코트 속으로 고개를 파묻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나도 분위기에 휩쓸리고 싶었습니다. 그대들의 미소가 멋졌고, 얇은 옷차림이 부러웠습니다. 훔치고 싶었지요. 생각했습니다. 이 무리들 속에서 외로워해야만 하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지. 분명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아니, 바랐습니다. 남몰래 눈시울을 붉히고 옷깃을 여미는 누군가가 있어야만 위로가 되어줄 기세였습니다.


폭설이 내리던 밤, 욕설을 뱉으며, 봄을 고대했습니다. 그 길고 더뎠던 시간 동안 이 계절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당신은 모를 겁니다. 날이 따스해지면 나 역시 새 사람이 된 양 괜찮아질 줄 알았습니다.

      

허나 나의 계절은, 아직 멈춰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따뜻함에 대한 갈망일 겁니다. 한겨울 가시나무 같은 내게 이제는 '따스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기에, 문득문득 길을 걷다 마주치는 길고양이의 혓바닥과 늦은 밤 고즈넉한 선술집의 홧홧한 알코올 내 금세와 가로등 불빛의 온기가 위안으로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수면제를 끊었습니다. 때문에 이젠 지독한 숙취와 머릿속을 헤집는 공이질과 씨름 중입니다. 담배가 늘었습니다. 반면 주량은 줄었습니다. 한두 잔만 마셔도 일렁이며 눈앞에 떨어지는 그대의 잔상 때문일 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내 멋대로 줄인 알약들 때문에 이리도 힘들어하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딱 줄어든 수면시간만큼 늘어난 고독에 휩싸일 때면 '어쩌다' 이런 고통을 겪는지 하늘이 원수 같습니다만. 어쩌면 '우리'라는 존재는 모두 '어쩌다' 만나 '어쩌다' 사랑에 빠지고, '어쩌다' 틀어져서, '어쩌다' 헤어지며. '어쩌다' 울컥움컥 그리워하는. 인생 전반에 걸쳐 '어쩌다'라는 명찰을 저마다 가슴속에 치덕치덕 붙이고 살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찢어진 콘택트렌즈 같은 이물감이, 마치 지금 이지러지는 벚꽃잎들처럼 아직 내 몸속에 완연합니다. 나의 겨울코트는 아직 새것 같습니다. 이 두꺼운 코트를 입고 다시 한번 나가볼 요량입니다. 가서 축제 인파들 속에서 나처럼 외로워하고 있을지 모르는 당신을 '어쩌다' 마주칠 계획입니다. 흘러간 노랫말 가사처럼 어쩌다 마주친 그대의 눈동자에 대고 말하고 싶습니다.

  

"반가워요. 어쩌다 보니, 이곳에서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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