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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삐 Apr 12. 2024

아, 나의 봄비.

또다시, 봄비가 말랑말랑 내립니다. 어찌나 다정하게 내리는지 꽃잎들마저 흩어지지 못합니다. 습기 가득한 창문에 어린아이마냥 생각나는 몇 단어를 적어봅니다. 창 밖으로 지나가는 '키 작은 사람'이 모두 '당신'으로 보입니다. 길을 걸어가는 하나의 우산 속 두 사람. 무척이나 품품하고 아름답습니다.

      

비 오는 날에는 추억이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오죠. 오늘보다 어제가, 이성보다는 감정이. 봄비가 내리면 누구나 아이가 되고 천사가 되어 추억을 떠먹습니다. 미풍에도 흔들리는 마음이지만 눈물을 머금고 흘러온 채, 마음의 길을 찾지 못한 부질없는 단어들마저 이 빗줄기 사이를 오가며 춤을 춥니다.      


흐드러진 벚꽃을 재촉하는 바람소리와 빗소리가 낮게 스며들며 세상을 끌어안고 있습니다. 나무도, 건물들도, 지나가는 자동차와 우산 속 연인들 모두 봄비 속에 숨습니다. 참으로 이 봄의 빗방울은 그 '무엇'하나 밀어내지 않고 모든 걸 품어줍니다.      


물감 번지듯 투명한 빗물을 맞으며 생각에 젖습니다. 결코 기다리지 않았지만은, 겨울 내내 핏물 고인 상처를 붙잡고 울어야만 했던 내게 이 계절은 '사랑일까?'를 '사랑이야.'라고 확인시켜 주었던 추억의 '그 시절'이기도 합니다.     


하얗게 꽃비 내리는 길거리를 밟으며, 활짝 피어난 생명체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느끼게 해 주었고, 어떻게 사랑해야만 '아름다움'을 공유할 수 있는 지를 사람의 눈길, 발길을 붙잡아두는 벚꽃을 보며 깨닫곤 했죠.      


봄은 나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살포시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사랑해야 할 이유와 그 가치를 깨닫게 해 준 고마운 계절입니다. 동시에 지금 몸부림치도록 사랑하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인연이 아니라면 예정되지 않은 어떤 날, 흩날리는 벚꽃잎처럼 홀연히 떠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 것 역시 이 계절입니다. 그러나 그만큼 '치열한 사랑'을 했던 과거조차 이 아름다운 풍경 앞에 제 풀을 꺾고, 짧디 짧은 속눈썹 위에 빗물과 함께 내려앉습니다.     

제 품을 뽐내며 고개를 치켜든 벚꽃잎들을 보고 있자니, 참으로 4월은 '잔인한 달'이라 생각합니다. 고작 며칠을 흐드러지게 피기 위해, 수 백일의 이슬을 견디고 흩날리는 바람결에 흩어지기 위해 '죽음'으로 명멸하는 꽃. 마치 당신과 나의 사랑과도 꼭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가 그치고 따스함이 전해져 오기 시작하면, 쌀알처럼 내려앉는 햇살에 나의 '묵은 것'을 말릴 테죠. 몸 안에서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오는 내 애증의 가락토리와, 놓지 못한 그리움, 헛된 것들, 그리고 비뚤어진 생각의 잔해들까지. 모두 가지런히 말릴 계획입니다.     


 벚꽃처럼 다가왔다, 이내 조각나 달아난 당신의 모습도 한 뼘 더 빨랫줄에 걸어놓고 축축 젖은 내 추억들의 쿰쿰한 내음새가 사라질 때까지 말려볼 생각입니다.      

그전에, 잊지 말고 후회하지 않도록.     


'딱, 이 비가 그칠 때까지만 슬퍼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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