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가지 그림자:심연》
그레이는 진짜 억만장자다. 고작 스물일곱의 나이인데 큰 회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 회사 저 회사 다 먹어치우고 있고, 15분 꼴로 24,000 달러를 번다고 한다. 그레이는 아나스타샤의 취업을 축하한다며 맥북과 아이폰을 선물로 보내주고, 좋은 헤어샵에 데려가며 개인 요트를 태워준다. 그리고 돈도 준다. 아나스타샤는 이 돈을 받을 수 없다고 수표를 돌려주지만 그레이는 '너 써' 라고 한다. 이에 아나스타샤는 그레이가 보는 앞에서 그 수표를 박박 찢어버리는데, 그러자 그레이는 벌떡 일어나 자신의 비서에게 전화를 해서는 '아나스타샤 계좌에 돈을 넣어' 라고 하는 거다. 아니..왜이러지? 내가 돈 주지 말래잖아? 싫다고 수표를 찢기까지 했잖아? 근데 왜 계좌에 돈을 넣으래? 도대체가 왜이렇게 말을 들어쳐먹질 않는거지? 야, 싫다고. 싫대잖아. 나도 취업해서 돈 벌고 있는데 니 돈 안받겠다고. 싫다는데 왜 꾸역꾸역 줘?? 얘도 참 어지간히 강압적이네. 진짜 딱 싫어...
이 억만장자 그레이는 자신이 돈 많은 걸 알고 있고 그걸 쓰는데에 거리낌이 없다. 게다가 상대가 자신이 사랑하는 아나스타샤라면 오죽할까. 자선 무도회가 있는 날 밤에 그녀에게 드레스를 골라보라며 수십벌의 드레스를 자신의 집에 가져와 골라보게 한다. 옷걸이에 좌악 걸려있어..
그레이는 돈이 많아도 보통 많은 게 아니다. 로또 같은 거 살 필요도 없을 정도로 돈이 많고, 로또를 산다면 당첨된 수의 조합을 포함한 로또까지 죄다 살 수 있다. 그러니 자신의 성적 취향까지 바꾸면서까지 옆에 두고 싶은 아나스타샤를 위해 좋은 옷과 좋은 차와 좋은 음식과 뭐 기타등등을 사주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아나스타샤의 입장에서 막 입사한 신입사원에게 월급이란 많지 않을 터. 자신이 1년에 버는 돈을 그레이가 한 시간안에 다 쓰는 것을 종종 목격할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나에게 이렇게 돈을 주지 말라고 말하고, 나였어도 이러지 말라고 말했겠지만, 이게 생각해보니 좀 복잡하다. 일단 내 연봉을 한시간안에 소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그를 만나면서 얼마나 많은 자괴감이 들까. 나 이만큼 벌기까지 겁나 스트레스 받는데 이 사람은 어쩌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쓰지? 하고 말이다. 그런 한편, 회사 다니기 싫은데 이 참에 회사 그만두고 이 남자 옆에서 지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당연히 들 것 같다. 내가 돈을 보고 그 사람을 사랑한 것도 아니고, 그 사람으로부터 돈을 뜯어내고자 연애를 시작한 것도 아니지만, 마침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억만장자라면,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해서 해주는 모든 것들을 누린다고해서, 그게 뭐 잘못된 일인가? 그러니 나는 그냥 그가 사주는대로 받아도 되는거잖아? 나 일하기 얼마나 싫었어? 그러니 얼마나 좋은 기횐가 말이다. 이거, 나쁜 거 아니잖아? 안 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거다. 너무나 돈 많은 한 쪽이 다른 한 쪽에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해주는데, 내가 그걸 받지 않을 이유가 뭐란 말인가? 나는 맥북 하나 살 때 이걸 살까말까 몇날 며칠을 고민했고 또 사면서도 할부는 몇개월을 할까를 고민했는데, 이런 내가 그레이를 사귄다면 그냥 '맥북 있었으면 좋겠네' 하고 말하면 끝이잖아? 내가 거의 이십년을 빡세게 일하면서 스트레스 받으면서, 눈에 다크써클 생겨가면서 일했는데, 지금처럼 새벽 다섯시반에 기상해서 하루종일 회사에 앉아있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걸 가질 수 있다면, 내가 그걸 선택하면 뭐 어때? 게다가 그 남자는 나를 사랑해서 나에게 해주는 게 기쁘대. 그러면 쌍방이 좋잖아?
그런데 내가 그랑 헤어지게 된다면? 그 다음은?
아아 경력단절..경력단절이 이렇게 오는구먼.
그와 연애하는 동안 일하지 않았던 나는, 그와 연애중에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었다 해도, 그와 연애를 끝내는 순간 다시 돈이 필요해진다. 그때 가서 일자리를 구하려고 하면 그 연애 기간이 길면 길수록 나의 경력단절의 시간도 그만큼 길어질 터. 재취업을 해도 월급은 쥐꼬리만큼일테고, 재취업이 된다는 보장도 없어. 게다가 나처럼 저기 어디에 있는 대학 나오고 저기 어디에 있는 회사를 다녔던 사람, 뭔가 스펙같은 거 1도 없고, 전문직도 아니며, 나이만 먹은 여자...의 경우엔 재취업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러면 나 어떡해. 뭐 먹고 살아. 아아 경력단절 노노해. 역시 회사를 다녀야겠구나.. 극중에서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일이 좋아서 자신의 일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나는 아니다. 이 일이 싫지만,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지금와서 경력단절 되어버리면 그 다음에 내가 살 길이 막막해지기 때문에 일을 그만둘 수가 없다. 계속 일을 해서 차곡차곡 내 커리어를 쌓아야지, 그래야 홀로된 노년이 다가온다고 해도 먹고살 수가 있겠지, 돈 많은 남자 만났다고 얼쑤~ 하면서 그 돈으로 살다가, 헤어지면 낭패야....
자신의 일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경제력을 가져야 한다. 애인이 있든 없든, 애인이 부자든 아니든, 그거와는 완전히 별개로 내가 먹고살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나는 벌 수 있어야 한다. 설사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돈이 많아 내게 돈을 준다고 해도, 내가 그 돈을 받아 쓰는 이상 권력의 추는 그에게로 기운다. 그는 내게 권력을 가진 사람이 되고 나는 그의 권력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집에서 가사노동을 한다고 해도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내 노동은 무임금 노동이고, 내 노동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당연히 해야 할 무엇이 되어 있다. 그러니 내가 사귀는 게 억만장자 그레이든 아니든 나는 나를 경력단절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함께 있어도 헤어져도 당당하게 그리고 단단하게 이 땅에 발 붙이고 살기 위해서는 경제력을 놓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마거릿 애트우드가 자신의 책, 《시녀이야기》를 통해 잘 보여주었다.
가까운 미래의 길리어드.
여자들을 통제하기 위해, 자기들 마음대로 계급을 나누고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여자들을 부리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여자들의 경제권을 박탈하는 것이었다. 멀쩡히 직장에 다니면서 돈을 벌고 있는 여자들의 계좌를 동결시켜 버리는 일. 여자가 일해서 번 돈이 들어있는 은행 계좌를 이용할 수 있는 건 여자의 남편이나 형제에 의해서 가능해졌다.
그들이 동결시킨 거야. 그녀가 말했다. 내 것도 마찬가지야. 여성 단체의 카드도 마찬가지야. M(남성, male-옮긴이)이 아니라 F(여성, Female-옮긴이)라는 글자가 박힌 계좌는 전부 그래. 몇 번 단추만 누르면 되는 일이야. 우리는 철저히 차단당한 거야.
하지만 은행에 2000달러나 입금해 두었는데, 나는 말했다. 세상에 중요한 게 내 계좌밖에 없다는 듯이.
여자들은 더 이상 재산을 가질 수 없게 됐어. 새로 입법된 법이야. 오늘 TV 켜 봤어?
아니.
TV에 나와. 하루 종일 나오고 있어. 모이라는 나처럼 경악하고 있지 않았다. 이상하지만 어떤 면에선 들떠 있었다. 자기는 오래전부터 이런 일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보란 듯이 들어맞았다는 것처럼.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더 생동감 넘치고 결연해 보였다. 루크가 너 대신 '컴퓨터 카운트'를 사용할 수 있어. 적어도 그들 말로는 그래. 남편이나 가장 가까운 친척이. -《시녀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p.306
내가 일해서 내가 번 돈이고 그래서 내가 예금해놓은 돈인데 그 돈을 내가 인출할 수 없다. 그 통장과 연결된 카드도 정지가 되어 있다. 그 돈을 쓰는 건 내 남편이나 형제여야 한다. 내 돈인데. 내가 예금한 건데. 내가 일한 내 돈인데.
내 돈을 내가 관리할 수 없게 되었는데 직장에서도 잘렸다. 그러니까 여자들을 직장에서 몰아낸 것. 그렇다면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랑 함께 사는 남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가 돈을 써서 나를 먹여 살리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나는 꼼짝할 수 없게 된 거다. 내가 무언가를 먹고 싶어도, 무언가를 사고 싶어도 이 모든 걸 나의 가까운 남자의 승인 하에 할 수 있게 되어버리니, 아무리 남자가 '원하는 건 다 하게 해 줄게'라고 한들 그것이 내 자유인가. 이미 '해줄게'가 되는 건데.
더 미치겠는 건, 이 일에 남편은 내 생각만큼 분노하지 않는다는 거다. 사실 별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아.
당신은 내 기분 몰라. 나는 말했다. 누가 내 발을 잘라 버린 기분이었다. 울지 않았다. 하지만 루크를 껴안을 수도 없었다.
일은 일일 뿐이야. 그는 나를 달래려고 했다.
당신이 내 돈을 다 갖는단 말이지. 내가 죽은 것도 아닌데. 농담처럼 말했지만, 막상 내뱉고 보니 소름이 끼쳤다.
쉿. 루크가 말했다. 아직도 마루에 무릎을 꿇은 채로 있었다. 내가 언제까지나 당신을 돌봐줄 텐데 뭘.
난 생각했다. 벌써 이이가 나를 봐주는 척하고 있어. 그러고는 또 생각했다. 벌써 나는 피해망상에 시달리는구나.
알아. 나는 말했다. 사랑해. - 《시녀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p.308
남편은 그것이 별 문제가 아니라는 듯, '내가 너를 돌봐줄 텐데'라고 말한다. 왜 한 사람의 성인이 다른 성인을 돌봐주어야 하는가. 그리고는 벌써, 봐주는 척하고 있다. 하아-
그이는 마음에 걸리지 않는 거야. 그이는 전혀 마음 쓰지 않아. 어쩌면 오히려 잘됐다고 여길지도 몰라. 우리는 더 이상 서로의 것이 아니야. 이젠, 내가 그의 것이 되어 버린 거야.
무가치하고 부당하고 비현실적이었다. -《시녀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p.313
사랑하는 사이인 어른 두 명이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있다고 구속력을 갖게 되는데, 나는 너만 볼게 너만 사랑해 라고 속삭이는데, 그러나 경제권이 어느 한 명에게만 가 있다면 그건 그 사이에 권력이 생김을 뜻한다. 돈을 쥐고 있는 쪽은 권력을 갖고 있고, 상대는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는 확신을 가지려 노력해도 이미 돈을 가진 쪽의 밑에 들어가 버려 꼼짝할 수 없게 된다. 아 너무 끔찍하고 너무 징그럽다. 내가 누누이 말했지만, 그레이가 엄청난 재벌이라 아나스타샤의 옷장을 가득 채워줘도, 그것은 아나스타샤의 자유가 아니다. 아나스타샤는 냉장고 바지 한 벌을 사더라도 자신이 번 돈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아나스타샤 스스로의 힘으로 예금 통장에 돈을 넣어야 한다. 그레이의 돈이 곧 내 돈이라고 생각하다가는 그레이의 마음이 바뀌는 순간 쫄딱 망해버리는 것이야. 그렇기 때문에 그레이가 '내가 너에게 부족한 거 없이 다 해줄 테니 너는 일하지 마'라고 해도 '안돼 이놈아 나는 나가서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버럭 대며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녀 이야기》에서는 그렇게 '내가 나가서 일을 할 것이다' 하는 여자들을 법으로 막아버린다. 안돼. 너는 일 못하고 돈 못 벌고 돈 못 써. 이게 새로 바뀐 법이야. 그렇게 여자를 남자에게 '속한' 것으로 만들어 버려. 자립할 수 없는 무언가로 만들어 버린다. 남자와 동등할 수 없는 남자의 아래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거다.
결국 이 사회에서 여자들은 사회가 정한 대로의 직업 혹은 신분만을 가질 수 있다. 사령관 씩이나 되는 남자의 아내들은 '아내'로 여성으로서 가장 '높은' 권력을 가지게 되지만, 그 외의 여자들은 실상은 대리모인 '시녀'가 되거나 집안일을 봐주는 '하녀'가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직장에서 쫓겨나고 내 예금을 내가 쓸 수 없게 되어버린 여자는 시녀라고 불리는 대리모가 된다.
대리모란 말 그대로 아이를 '대신' 낳아주는 걸 뜻한다. 아내가 낳을 수 없는 아이를 대신 낳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 이 책에서 대리모가 남편과 번식 행위를 하기 전까지 나는 당연히 침실에서 별개로 남편과 대리모가 성관계를 가지는 건 줄 알았다. 쉽게 말하면 첩의 역할 같은 걸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나 시녀와 하녀 그리고 아내로 나뉜 이 세상에서는 쾌락을 절대 허용할 수 없다. 섹스는 아이를 낳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그것에 쾌락이 끼어들어서도 안되고, 은밀함과 감정이 끼어들어서도 안돼. 너무 충격적이었던 게, 시녀와 남편이 아이를 갖기 위해 행위를 하는 그 순간에 아내가 그 자리에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섹스는 아내와 남편의 것이되, 그러나 자궁만은 대리모의 것 이 되어버리는 거다. 아내도 눕고 그 아내의 배에 머리를 대고 시녀가 눕고, 그리고 남편은 키스 없이 시녀의 자궁에 씨를 뿌리는 것. 이 감정 없는 행위가 끝나면 마치 이 일을 치러낸 것은 아내의 것인 듯 아내도 쉬어야 하고, 그렇게 임신하여 시녀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 역시 바로 아내에게로 가 아내의 아이가 된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야. 하아-
세 명 모두가 뻘쭘한 이 짓을,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하고 있는 거다. 시녀는 단지 자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여성을 단지 자궁으로 취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길리어드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이 경제력을 빼앗는 것이었다. 게다가 경제력을 쥔 쪽은 경제력을 의존해야하는 상대방을 봐주는 입장이 될 수 있다. 힘은 이런식으로 이동하고 작동한다. 그러니 억만장자 남자친구를 가진 아나스타샤라도 반드시 자신의 경제력을 쥐고 있어야 하는 거다.
아나스타샤, 돈을 벌자! 남자친구가 있든 없든 남자친구가 돈이 많든 적든, 그것과 별개로 온전히 네 자신이 경제력을 갖출 수 있도록 돈을 벌자. 경제력을 놓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