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에게》
쥰에게는 부치지 못한 편지가 있다. 이십 년 전에 헤어진 사랑하던 윤희에게 보낸 편지. 그녀는 부치지도 못할 편지를 쓰지만, 그녀가 우체통에 넣지도 않은 편지는 그러나 윤희에게 전해진다. 이십 년이란 시간이 그들 사이에 있었지만, 윤희에게, 보낸 편지는 윤희에게 가 닿는다. 헤어지고 이십 년이 지나서야 굳이 왜 이렇게 편지를 보낼까, 그 편지 안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져서,라고 쓰여있었다. 쥰이 윤희에게 안부를 묻지 않고 살 수 있었던 시간, 참을 수 있었던 시간은, 아마도 그 한계가 20년이었는가 보았다.
편지 안에서 쥰은 윤희의 꿈을 자주 꾼다고 했다. 요즘 들어 특별히 더 나온다고.
20년간 죽은 듯이 살았다. 20년 전에 쥰을 사랑했던 자신이 혹시 병에 걸린 건 아닐지, 잘못된 건 아닐지, 그녀는 쥰과 헤어지고 오빠가 소개해준 남자랑 그냥 결혼해서 딸을 하나 낳았다. 그 딸은 이제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고, 엄마 앞으로 온 편지를 먼저 발견해서는 엄마와 그 오랜 친구를 만나게 할 계획을 세운다. 엄마, 우리 둘이 여행해본 적 한 번도 없잖아, 우리 둘이 여행 가보자.
일은 고되고, 헤어진 남편은 자꾸 술 마시고 집 앞에 찾아오고.. 삶에 재미라고는 통 없던 윤희는 일을 그만두고 딸과 함께 쥰이 사는 동네로 여행을 간다. 눈이 내리고 내리고 계속 내리는 곳. 딸이 잠든 틈을 타 택시를 타고 편지 봉투에 쓰여있던 주소지로 찾아가 본다. 마침 출근하려던 쥰이 나오는 것 같아 윤희는 잽싸게 몸을 피하고, 그리고 벽에 기대어서, 자신을 보여주지 않은 채로 운다. 이십 년간의 그리움이 그 눈물 안에 있었다.
영화는 놀랍게도 이 사랑했던 사람들이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득 보여주면서도 이 둘을 한 씬에 넣는 걸 계속 미룬다. 장면 장면, 대사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에 그리움이 꾹꾹 눌러 담겨 있는데, 그간의 삶 역시도 그러했다는 걸 이렇게나 은은하게 잘 보여주는데, 그러면서도 이 둘을 한 장면에 같이 넣질 않아. 그런데 화면 밖으로 애틋함과 그리움이 터진다. 그들의 이십 년 세월에, 부재하면서 그들은 서로에게 계속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존재를 드러내는 가장 강한 방식이 부재가 아닐까. 부재함으로써 그 존재를 인지한다는 것.
함께이지 못하기 때문에, 헤어졌기 때문에 그리워하면서 각자가 감당해야 하는 몫은 다르다. 윤희는 그 시간을, 그러니까, '주어진 여분의 삶을 벌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는 '나는 잘못한 게 없다'라고 생각하고. 이십 년이나 꾹 참았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어 적었던 편지는, 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윤희에게 가 닿았고, 윤희 역시 꼭꼭 눌러 답장을 섰다. 윤희의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나도 네 꿈을 꿔."
영화는 시작부터 너무 좋다. 영화음악 까지도 찰떡이라 한겨울에 이 영화음악의 시디를 걸어둔다면 반드시 혼자여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꿈에 대해 생각했다. 너무나 그리워 당신의 꿈을 꾼다는 것. 나 역시 그리움에 누군가를 꿈에서 만나면, 바로 그 꿈을 상대 역시 똑같이 꾸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오늘만큼은, 꿈에 나왔으니 당신도 내 생각을 하도록. 쥰은 윤희의 꿈을 꾸었고 윤희는 쥰의 꿈을 꾸었다.
기다림의 시간이란 것도 생각했다. 일전에도 언급한 적 있지만, 이십 대 중반 내가 헤어짐을 말한 남자는 내게 '3년이고 30년이고 네가 나를 남자로 봐줄 때까지 기다리겠다'라고 울며 말했었다. 그러나 그는 3주도 안되어 다른 여자를 여자 친구로 사귀었다. 어떤 기다림은 그렇게, 자기의 입 밖으로 꺼낸 말과는 상관없이 어그러진다. 그러나 어떤 기다림은, 참고 참았다가 사실은 네 생각을 해, 하고 말하여지는 기다림은 이렇게 차곡차곡 쌓여서 20년이 되기도 한다.
그 기다림이 그저 20년간의 부름 없는 기다림이었다면 아마 30년이 되기도 하고 40년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평생을 기다림이란 화두만으로 삶을 유지해야 했겠지. 그러나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쥰은 20년 만에 부름을 택하고, 윤희는, 20년 만에 응답을 택한다. 20년간 내내 각자의 삶을 살며 어제가 오늘이 되고 오늘이 내일이 되었던 윤희와 준은, 참을 만큼 참고 난 후에야, 20년이란 긴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들 사이에 그만큼이나 시간을 쌓은 후에야, 서로의 앞에 선다. 그들은 조우한다. 우연인 듯 그러나 우연이 아닌.
아, 너무 좋아, 대체 얼마나 보고 나는 좋아하는 거야. 영화 시작한 지 18분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결국 곳곳에 스며든 그리움이 생생해 울고 말았을 때는 영화 시작한 지 35분이 지나있었다.
올해 본 한국영화 중에 최고였다. 너무 좋았다. 기다림을 생각하고, 서로 다른 나라에서 서로를 그리워하는 쥰과 윤희를 생각하고, 각자의 삶을 묵묵히 살아내는 그들을 생각했다. 그리움을 생각하고 추억을 생각했다. 참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어쩌면 20년이 필요한 거구나,라고도 생각했다. 2년은 아직 짧은 거구나, 나도 20년이 지난 후에야 부름을 선택해야 했어. 20년이 지난 후에 부른다면 그때는 윤희가 쥰에게 답장을 보낸 것처럼 나도 답장을 받을 수 있는 걸까. 우리는 결국 서로를 마주 보고 서게 될까. 그리고 나도 네 꿈을 꿨어,라고 말하게 될까. 20년을 기다리자,라고 입 밖으로 내면 나 역시 어그러질지도 몰라. 하루를 또 하루를 그 위에 차곡차곡 쌓아야겠다.
쥰의 편지는 부치지 못한 편지였다. 윤희에게 썼으나 윤희에게 부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쥰은 윤희에게 부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편지를 발견한 고모는, 망설이다가 우체통에 밀어 넣는다. 그렇게 윤희앞으로 쓴 편지는 윤희에게 가 닿는다.
윤희는 쥰이 사는 마을까지 가서 몰래 쥰을 보고 오기까지 했지만, 그러나 쥰 앞에 나타나지도 못했고 만나자고 말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윤희의 딸은 그들의 만남을 계획한다. 그렇게 쥰과 윤희의 만남이 있기까지 다른 사람들의 의도와 의지가 섞여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만남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 때문에 이루어진 것일까?
나는 쥰의 고모가, 윤희의 딸이, 쥰과 윤희의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낸 것이라 생각한다. 너무나 강하게 원하면 삶은 그쪽을 보고 걸어가게 되어있다. 그쪽을 보고 걷는 틈틈이, 그 강한 바람은 다른 것들을 불러들인다. 고모의 편지 발견이 그랬고, 우편함에 꽂힌 편지를 먼저 발견한 윤희의 딸이 그랬다. 윤희와 쥰이 간절히 간절히 서로 사랑하고 그리워하였으므로 그 마음은 온 우주에 전해져 그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줌파 라히리'의 단편 <길들지 않은 땅>이 생각났다. 영화를 보고 울다가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얼른 책장으로 가 줌파 라히리의 책을 꺼내왔다. 《그저 좋은 사람》의 가장 처음 실린 단편인데, 그 단편을 딱히 좋아하지는 않았었다. 나는 <지옥천국>을 좋아했지. 그러나 부치지 못한 편지를 대신 부쳐주었던 장면이 떠올라 얼른 그 단편을 읽고 싶었다.
루마는 엽서를 손으로 눌러 펴고, 우편번호 위에 묻은 흙을 손톱으로 긁어냈다. 엽서를 뒤집어보니 아버지가 여기 온 기념으로 고른, 별 특징 없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루마는 집 안으로 들어가 탁자가 있는 복도로 갔다. 서랍에서 두루마리 우표를 꺼낸 다음 그중 하나를 떼어 엽서에 붙였다. 그날 오후 우편배달부가 오면 엽서를 가져갈 수 있도록. -줌파 라히리, <길들지 않은 땅>, P.75
루마의 아버지는 아내와 사별한 뒤 이제 여행을 다니며 살고 있다. 그곳에서 동향의 사람인 박치 부인을 만나 좋은 사이가 되었다. 시간을 내어 딸의 집에 놀러 왔다가 노는 땅을 보고는 거기에 꽃이며 나무를 심어주었다. 그리고 세 살 손자와 놀아주었고. 그러나 딸의 집은 편하지 않았다. 어서 빨리 혼자가 되고 싶었다. 다음 여행에서는 박치 부인을 만나서 함께 잠들기로 했다. 그 날이 기다려졌다. 그는 외출했을 때 엽서를 사서 그녀를 생각하며 적어내려 갔다. 혹여라도 딸에게 들킬까 봐 관광책자에 넣어서 서랍에 넣어두었는데, 딸의 집을 떠나는 날에 그 책에 꽂힌 엽서가 없어진 걸 발견했다. 여기저기 찾아보았지만 비행기 시간이 와서 그 엽서를 찾지도 부치지도 못한 채로 딸의 집을 떠나왔다.
그 엽서는, 뒤뜰에 땅을 파고 세 살 손자가 심었다. 싹이 나라고. 장난감을 심으면서 그 엽서도 심었다. 땅에 꽂혀있던 엽서는 딸인 루마에게 아버지가 떠난 뒤에야 발견됐다. 아버지가 나랑 같이 살지 않으려는 이유, 아버지가 즐거워 보이는 이유, 그게 바로 이것이었구나. 루마는 그냥 버릴까, 하다가 그 엽서를 보내기로 한다. 부치지 못한 엽서는, 그렇게 아마도 받아야 할 사람의 손에 닿게 될 것이다.
박치 부인은 답장을 쓸 수 없을 것이다. 루마의 아버지가 딸의 집에 방문한 그 잠깐 동안 보낸 엽서이니까. 그러나 박치 부인은 2주 후면 루마의 아버지와 다른 나라에서 재회할 수 있다.
쥰은 윤희를 만났다.
부치지 못한 편지가 부쳐지면, 상대의 손에 닿으면 그렇게 만날 수 있는 것인가 보다. 그게 부치지 못한 편지의 마법일까.
영화를 다 본 후에 여동생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 영화를 보라고 말하면서 나는 덧붙였다. 꼭 혼자 보라고.
이 영화는 혼자 보아야 한다.
20년을 기다리면 된단 말이지.
20년.
나는 도대체 몇 살인가.. 너무 늙어가지고 네가 있는 나라에 가지도 못하겠구먼..
플랭크를 좀 더 열심히 해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