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pyt Oct 25. 2024

매트리스만 깔아도 꽉 차는 집에서 산다는 것

실로 군더더기 없는 삶

공인중개사님이 처음 방을 보여주시면서 이전에 살던 분이 잠만 잤던 방이라고 했다. 그만큼 이전 세입자가 방을 깨끗이 썼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하신 말이었겠지만, 실제로 생활해 보니 매트리스를 펼치면 방 면적의 2/3 정도를 차지하는 바람에 ‘정말 잠만 잘 수밖에 없겠다’ 싶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집의 청결함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공간의 크기에 따른 물리적인 법칙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최근 ‘잠을 자고 나서 매트리스를 정리할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일생일대의 고민을 하곤 했다. 저녁 시간대의 생활공간 확보를 위해 매트리스를 접어야 하는 것은 타당해 보였지만, 이를 위해 식탁과 의자를 옮기고, 깔개와 이불을 접는 것은 생각보다 귀찮았다. 게다가 매트리스 정리를 하는 것만으로도 뭔가 큰 일 하나를 끝낸 것 같아서 마냥 쉬게 된 적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저녁에 일정이 있어 집에 밤이 다 되어서야 돌아오는 게 확실할 때면 아침에 그냥 나가기도 했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빨리 나가야 할 때도 매트리스 접을 시간이 어디 있냐며 그냥 나갔다. 한마디로, 요새는 생활공간 확보고 뭐고 매트리스를 24시간 깔고 지내고 있었다.


오늘 밤엔 밤 10시가 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예상대로 집엔 늦게 도착했지만,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이미 매트리스에게 내 생활공간의 절반 이상을 빼앗긴 상황이었으나, 매트리스의 이름이 ‘매트’ 리스 아닌가? 매트리스는 단순히 인간이 누웠을 때뿐만 아니라 좌식생활에도 효과적인 매트가 되어주었다. 기본 옵션이었던 TV장에 베개를 세로로 세워 몸을 기댈 수 있도록 만들고, 푹신한 매트(리스)에 앉았다. 스포티파이에서 내가 '좋아요'를 눌렀던 노래들을 들으며, 과거의 나의 취향에 감탄하며 과제를 했다.


어젯밤엔 이 좁은 방에 나 혼자 있다는 것이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태엽 감는 새 연대기>에 나오는 깊은 우물 속에 혼자 남겨진 것만 같았다. 다시 오를 수 있는 사다리도 없고, 우물 뚜껑은 닫혀있어 시간조차 감지할 수 없는 삶. 밥은 안 먹어도 되겠지 싶었는데 허기는 어김없이 찾아왔고 밤 10시가 넘어서야 어둠 속에서 일어나 냉장고에 있던 먹고 남은 닭강정과 누린내 나는 닭다리살을 데워먹었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오늘도 여전히, 나는 매트리스만 깔아도 방이 꽉 차는 방에서 살고 있다. 이 물리적 좁음은 때로는 답답함을 만들지만, 소설 속 인물이 ‘생각’을 하기 위해 우물에 스스로 들어간 것처럼, 나 또한 이 우물 속에서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고 작업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데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받고 있다. 여러 가지 변화 속에서 나는 아직 나에 대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때로는 빛이 들어오지 않아, 나의 존재에 대해 인식하려면 스스로를 더듬거리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1년쯤 헤매다 보면, 나에 대해 조금은 알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있는 우물은 소설과 달리 와이파이도 잘 터지는 편이니, 세상과도 조금은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역시 정리하지 않길 잘했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