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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um Mar 19. 2021

담배를 피우는 인디언 핑크빠

경계선 성격장애

2006년 서울에서의 생활이 어느 정도 될 무렵 30대를 접어들었을 때 나의 옷과 소지품들이 핑크로 둔갑하기 시작했다. 내 마음의 허한 상태를 어디서 채워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내면의 갈증이 있는 내게 무엇인가를 채워야 하는지를 찾고 있었다. 그러다 찾은 핑크색. 여자 아이들의 상징인 그런 분홍이 아니라 인디언 핑크였다.

내가 느끼는 분홍은 탁한 무언가가 한 발을 빼지 못하는 세상의 약하고 솔직하지 못한 그런 색으로 다가왔고 인디언 핑크는 심약한 마음을 어루만져주듯 채도에서 주는 안정감이 어른 여성의 아름다움과 세련됨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서 인디언 핑크와 함께 지내면 왠지 나의 보이지 않는 허무함을 채워줄 수 있을 거라 느꼈졌다. 어릴 적 나의 결핍은 인디언 핑크 안에 섞여있는 순수한 노란색이 채워줬고 섞여있는 핑크색은 나의 억눌렸던 여성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켜주었다. 그래서 인디언 핑크에 빠지는 나는 더 이상 엄마가 좋아하는 보라색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색을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혼자만의 인디언 핑크만의 세상과의 놀이가 시작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만난 좋아하는 대상이라 더없이 좋아할 수밖에 없었고 가끔 나의 집에 올라오신 엄마는 그런 나를 내버려 두었다가 많은 옷가지들의 헹거를 보고 돈을 이런 데다가 낭비하냐며 호통을 치지만 엄마와 난 다르다는 것을 핑크로 보여주듯 난 내가 좋아하는 색이고 이 옷을 입을 때 기분이 좋아짐을 얘기하고 입고 다니지 않아도 좋다는 것을 얘기하곤 하였다.

나의 학창 시절 살았던 부산에서는 교복을 입고 다니다 졸업하고 어쩌다 엄마가 사게 되는 옷 같은 건 죄 검은색이나 브라운 계통인 때가 안타는 그런 옷들이 대부분이었고 습관적으로 어두운 색을 입어 버릇했던지라 나만의 색깔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살아왔었다. 어릴 적 난 핑크를 입고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었다. 우리 집은 딸이 셋이나 되었지만 그 흔한 여자 아이를 위한 핑크가 없었던 것이다.

서울에 올라와서 나만의 세상에서 나만의 공간에서의 나 자신과의 시간들은 온전히 나와의 교제 시간이었다. 이젠 더 이상 동생을 위해 나의 수입을 쓰지 않아도 되고 서울에서의 삶은 온전히 나를 찾은 것에 다행이라 생각하고 피폐해진 나의 몸과 정신을 위해 자신을 아껴주려 하였다.


<참조> 나의 아빠는 저장강박증이다


어느 날 토요일 회사에서 일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홍대에 들러 우연히 진열되어 있는 인디언 핑크색 예쁜 가방을 보았다.

한참을 그 앞을 서성거리다 지나쳐서 갔지만 다음날도 그 색의 가방이 머릿속에 아른거리길래 난 다시 그 홍대 인디언 핑크 가방이 진열되어 있는 가게로 향하였다.

내가 주인이 되어주겠노라 사자고 작정하고 나의 자식인양 그 가방을 사 가지고 난 기분이 너무 좋아 집에 왔다. 비싼 가방도 아니라 3만 원도 안 했던 것 같았다.

이제까지는 때가 안타는 그런 가방들이나 디자인을 무시한 그런 튼튼한 가방들이라서 내가 원하는 색깔과 가방을 사고 나니 내 안에 여성성이 뿜뿜거림을 느끼고 나도 모르는 마음속의 희열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한 감정은 곧 본능적인 무언가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막연하게 나를 찾아 헤매는 그런 과정을 그냥 나를 관찰하면서 내 안의 소리들에 집중하면서 핑크 빠가 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가방으로 시작하더니 결국 걸쳐진 옷가지들과 구두까지 전부 핑크로 장식하기 시작하고 이것들이 또 다른 나인 양 보물처럼 보관하고 또 사러 다녔던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들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나의 갈증을 채우는 것에 더 집중하였다. 그것이 나의 기쁨일 것이라고 착각하고 그것이 나의 기쁨이라 분별하고 난 나의 공간에 하나씩 핑크로 채우기 시작했다.




어릴 적 워낙 아껴서 써야 한다는 부모님들의 훈육은 곧 나의 몸에 배어서 나를 위한 새것을 사는 것이 익숙함을 느꼈던 것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물건을 살 때는 내가 아무리 좋아도 나도 모르는 신중함으로 고민을 하고 또 고민을 해야지만 살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처음 발견하고 생각한 것은 내가 나에게 사치를 부릴 수 있는 돈을 어느 정도는 정해놓고 사기로 했다.

명품 같은 것은 언감생심 거뜰떠도 보지 못했다. 주위 친구들은 턱 하니 하나씩 자기를 위해 사는 걸 보고 부럽다기보다는 한 달 월급보다 많은 돈을 저기다 쓰면 행복할까를 되려 물어봤다.

20대 서울 여자들의 자기 관리는 언제나 세련됨을 추구했고 비싼 가방 한두 개는 가지기를 원했으며 한두 달에 한 번은 미용실 가서 펌을 꾸준히 해주고 사람들을 만나는 장소들을 찾아 헤매 고급 레스토랑에서 몇만 원씩 하는 그런 식사들과 와인을 즐겨먹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친구들을 초대하거나 자신들의 마음을 표현할 때는 정성스러운 그런 편지와 함께 정성스럽게 예쁜 봉투에 담긴 선물을 하는 것을 보고 따뜻함을 많이 느꼈다. 정확하게는 처음에는 사치스럽게 느꼈었다가 여유로움을 가진 사람들의 자신을 표현하는 따뜻한 인사 정도로 느끼게 되었다.

내가 살아온 시간들에는 그런 여유로움이 학창 시절 무뚝뚝한 친구들과의 선물 말고는 없었기 때문에 그것도 쑥스러워서 잘 안주는 분위기였으니깐 말이다.

서울 생활은 점점 나로 하여금 표현의 자유의지를 샘솟게 하였고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내가 가지는 자유함을 가지고 쓰고 싶은 것도 없었던 날 가엾게만 바라볼 수는 없었으므로 빠르게 적응해보자고 생각했다.

친구들을 초대해서 집밥을 먹으며 내가 좋아하는 인디언 핑크색을 띤 옷들을 보여주었고 어른인 척 관심분야를 공유하면서 살고 있었다.


난 그렇게 서울 생활을 혼자 있는 시간을 달래고 있었다.

그런 친구들이 가고 난 후 나의 적막함에 담배 한 모금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그런 비밀 공간에서의 연기와의 놀이도 계속되고 있었다.


난 하나의 색에 집착하고 하나의 색으로 표현하고 싶어 하는 강박증을 앓고 있었다

또한 절망감에 외적인 상처들로 인한 우울증과 어릴 적 원만한 가정에서의 관계의 결핍으로 인한 미약하기는 하나 성인 발달 장애를 앓고 있었다.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른 채 방치되어야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난 병리적 현상인지도 모르고 지나치고 있었다.


핑크는 여성성을 상징하고 타인에게도 여성성을 내비치고 싶은 욕구가 강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릴 적 남자아이처럼 취급받고 자라난 나를 위해 최대한 나의 몸과 정신에 필요한 적절한 때를 놓쳤다고 늦게나마 성인이 되어서 어른 여성이 갖추어야 하는 그렇고 그런 과정에 충실하기로 하였다.

핑크를 갈망하고 있는 나의 정신은 나의 손톱과 화장까지 죄 핑크로 꾸미는 것을 좋아하고 그것이 이쁘다고 생각했다. 점점 더 많아지는 옷과 소지품들이 헹거에 가득 채워졌을 때 난 헹거 앞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심리적 만족으로 이끄는 무언가를 하루에 한 번은 인디언 핑크색을 보면서 행복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엇이 나를 핑크 빠로 만든 것인가? 라는 나의 질문에 난 어릴 적 여자 아이로서 받지 못한 애정의 결핍은 이렇게 나를 한 가지 색에 집착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핑크가 또 다른 나인것이가? 라는 질문에 난 부모들의 인격장애로 유아기에 형성되는 인격이 형성되지 않게 되면 벌어질 수 있는 장애유형 중 경계선 성격장애로 나를 울타리 치고 있었던 것이다.


새벽 동대문 시장을 돌아다녀야 하니 토요일 회사를 마치고 집에 가서 쇼핑할 준비를 마치고 동대문 시장에서 밤을 새우며 옷들을 사는 나를 들킬까 봐 아무렇지 않은 척 그다음 날 교회를 갈 때면 믿음은 나의 속을 채워 줄 거라 나의 겉은 내가 채워야 하는 것이라 나를 변명하고 합리화시켜서 그런 시간들을 즐겼었다.

옷이 가득한 방에 많은 옷을 보고는 내가 나를 가꾸고 일을 다니는 여성임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나의 매무새를 신경 쓰는 나이에 최대한 어릴 적 하지 못한 시간들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당당하게 하기도 하였고 가끔 올라와 나의 방에 있는 옷들이 많다고 왜 그런데 귀한 돈을 낭비하냐는 엄마에게 사춘기를 가정의 분위기에 혼자 억눌러야 했던 때를 보상이라도 받는다고 변명하면서 지나쳐버린 질풍노도의 시기가 성인 되고서야 얼굴을 내비치기라도 하듯 대들기 시작했다. 지금도 차별을 하면서 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에게 어릴 적 옷을 사입히지 못한 엄마에게 탓을 돌렸다. 그때의 난 나의 자아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일탈의 연속이었던 질풍노도의 어른 아이라는 것을 모르고 혹여 엄마의 잔소리가 나를 해칠까 두려워하는 그런 어른 아이 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나씩 난 나를 심연에서 끌어올린다고 생각하고 나만의 가치관을 고수하지만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점점 끌어내려가고 있는 것을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담배를 태우는 나의 모순을 난 경멸 하였다.

나의 몸을 귀중히 여겨야 함을 배웠는데 난 나를 학대하고 있었다. 10년간의 담배를 피우던 나의 습관은 나의 질책과 나의 경멸함과 신앙의 힘으로 시도를 해보기로 하고 몇 번의 유혹은 있었지만 그렇게 습관을 바꾼 것이다. 인격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성격은 세상으로 하여금 학습되고 익숙하여지지만 어떤 대상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있을 때 사람의 삶은 변하기도 하는 것을 난 경험하였다.

사람은 변한다는 것을 난 실천 해야 했다.

나의 가정에서 벗어나는 길이고 나를 찾는 길이고 내가 믿고 있는 진리를 확인하고 싶어서이다.

고상한 진리 속 말들의 변명과 핑계와 합리화는 사람이 아닌 본질을 추구하게 하였고 사람들이 만들어 낸 종교의 폭력에 휘둘리지 말고 분별력을 깨닫게 되는 날을 또 기대하고 희망하였다.


진정한 자아와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어른 아이는 내적 갈등이 갈증을 해소하는 대상을 찾아 헤매는 그런 결핍 덩어리로 30대를 막 지내고 있었다.

어떤 문제가 내 안에 요동치고 있음을 직감하고 나를 찾아야겠기에 난 상처만 받는 한국을 무작정 떠나고 싶어서 미술을 공부하고 싶었던 난 동생이 있는 독일을 가야겠다 마음먹었다. 엄마의 동생 뒷바라지는 같은 배속에서 난 다른 자식들과 보기 좋게 간극이 벌어져 있었고 난 더 이상 박탈감을 이런 상황에서 받고 싶지 않았고 동생의 위치를 쫓아가고 싶었다.

인정받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선택한 상처 받지 않는 길이라 생각한 것이다.

학위가 벌써 3개로 계속되는 동생의 도전은 엄마의 희망이었던지 난 이 삶의 간극 차이를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간극으로 인한 앞으로의 다른 가족들이 겪게 되고 벌어질 감정들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뒤늦은 유학이라는 세상의 길에 발을 들여놓기로 한다.

지방 전문대 졸업장으로 갈 수 있는 독일의 대학을 찾아 헤매다가 미술 유학원을 등록하고 그림을 다시 공부하기로 한다. 나에 대한 희망이 없이 살아가는 나의 30대를 절망감으로 보내기가 싫어서 난 나를 시험하기로 한다. 안되면 다시 돌아오면 된다는 식이었다.

이제는 무서울 것이 없지 않냐는 세상의 쓴맛을 어느 정도는 봤다는 담대함이 나를 또 다른 에너지로 이끌고 있었다. 내가 바로 서지 않으면 나의 울타리인 가족들의 횡포에 본의 아니게 상처를 받을 것을 알기에 다부지게 서있기만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자고 선언한 것이다.

나의 내면의 소리도 들을 수 있어서 좋아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나의 용기는 결혼하자는 어떤 남자를 사랑하지 않는 이유로 나이에 맞는 결혼보다는 모험과 도전을 하는 독일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나의 부모님이 이혼했다는 이유로 헤어지자고 했던 남자는 곧 자기가 심하다고 생각해서인지 몇 달 뒤부터 5년간 한 달에 한두 번 밤만 되면 술 먹고 자기를 봐달라 전화를 했다. 새벽 1시 정도.

맨 정신에 하고 싶은 얘기 해달라는 나의 부탁은 언제나 묵살당한 채 그런 자기 생각을 이해해 줄 거라 생각했는지 끊임없는 행동에 이별을 고하기로 하였다.


<참조> 엄마의 페르소나


그러면서 나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자신을 사랑해 주면 되는 것이었다. 정확하게 사랑의 본질을 알게 된것이다. 원초적 인간은 사랑으로 만들어졌으며 그것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것을..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의 선택은 고통 자체도 수반되지 않을 수 있는것임을.. 사랑이라는 대상을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나를 이미 선택했다는 것을.. 그리고 사람은 사랑하고 믿는 존재라기 보다는 사랑을 주어야 하는 대상인것을..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으로 나의 허물을 벗게 만들고 그 안의 나의 순수한 의지가 나올때까지 나를 내려놓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난 내가 아닌 어떤 대상에게서 나를 맡겨져 있는 하나하나를 버리기로 하였다.

10년간의 담배를 피우는 습관이었는데 나에게 유익함이 없음을 깨닫고 나쁜 습관을 고치지 못하는 나를 타락한 존재라고 경멸하게 될쯔음 연기와의 이별이 되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면서 색들의 조화로움이 주는 아름다움과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나의 또 다른 잠재력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의 속이 조금씩 채워지고 꿈을 이룰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한 순간 나의 꿈틀거리는 에너지를 지키기 위해 난 한 가지 색에 집착하는 인디언 핑크빠와의 이별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영혼을 피폐하게 만들었던 부모와의 관계의 단절을 꿈꾸고 있었다. 그로 인한 대상마다 경계를 하고 있는 나의 성격을 형성하고 있는 울타리들을 내 안의 꿈틀거리는 에너지인 자유의지로 내가 살고 있는 시간으로의 이별을 할 수 있었다.  




어릴 적 나의 꿈은 화가였다. 미술 공부를 하고 싶은 난 하루에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그리고 밤을 새워서 이제껏 그리지 못한 그림들을 다 그리겠노라는 식으로 그림만 그렸다. 힘들다는 생각보다 즐겁기만 한 나의 그림 바라기는 32살 한국의 학원에서 시작하였고 독일 유학을 준비하면서 나의 30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안의 페르소나들과의 이별의 순간을 난 혼자서 기뻐하면서 기나긴 내 여정의 다음 행로의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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