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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um Apr 05. 2021

내 딸 같아서 그랬다?

합리화하는 늙고 낡은 종교적 폭력

독일에 사는 한국사람은 독일의 문화를 지켜야 하기에 한국문화와 독일 문화를 하루에도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는 문화적 정체성들을 겪게 된다. 이건 고향을 떠나 사는 사람들의 과정일 뿐이다. 독일에 사는 어른들은 예전 광부나 간호사로 오신 분들이 삶의 기반을 독일에서 잡은 사람들이 많아서 1970년대 오신 분들이나 늦어도 80년대 오신 분들은 한국의 낡은 사고방식을  고수하며 살아가시는 분들이 많아 한국 유학생들과의 사고의 차이가 세대차이뿐만 아니라 시대 차이까지 경험하게 되는 착오와 오류를 많이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반대로 그들은 한국 유학생들로 하여금 한국의 최신 트렌드나 이슈를 접하기도 하면서 한국의 향수를 접하기도 한다. 그들 중 대부분은 한국을 그리워 잊지 않으려고 한국 문화를 고수하면서 살고 계시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나 같아도 유학생으로 독일에 가서 10년을 있었으니 한국 문화가 그리워 한국 드라마나 소식들을 인터넷으로 접하기를 꾸준히 하기 때문에 이해가 되었다.

1970_1980년 한국을 떠나온 분들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생각하면서 타국 생활을 하기 때문에 한국을 갓 떠나온 유학생들과의 생각의 차이로 서로가 힘들어질 때가 많다. 그분들이 한국을 떠나기 전은 가부장적인 유교문화가 한국에 뿌리 깊게 있었던 사회적 분위기였기 때문에 무엇보다 의견 대립이 일어나면 시대착오적인 생각의 대립은 언제나 경계선이 항상 있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어르신들도 있다.

독일의 검소함과 외로움을 무기 삼아 삶을 지향하는 몸부림이 타인으로 하여금 아우라를 잔잔히 불러일으킬 작지만 강한 분들은 몸소 배우시고 삶에 실천하시는 분들은 내면의 무언가가에서 나오는 허름하지만 단아한 옷과 정갈한 머리 모양 또는 본질을 추구하는 말투에서 인격이 묻어나게 만든다.

거울이 되게도 하고 나도 거울인 존재로 살게 하는  간접적 영향은 힘든 유학생활에 자극이 되기도 한다.



내가 일하는 곳은 학교 다니면서 여러 가지로 도움을 받는 곳이기도 하지만 나로 하여금 인격수양의 터전이기도 하다. 2011년 학교를 다니면서 Mensa에서 일하다가 아는 동생의 소개로 한인 식당에서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받고 그곳에서 같은 학교 학생들 일하며 서로의 고충이나 힘듦을 이해하면서 한인 식당에 수년간 일하고 있었다. 오랜 독일 생활로 우울증이 심했던 여자 사장님은 본인이 살고자 음식을 팔면서 한국 유학생들과의 교류로 점차 활력을 되찾았다고 하며 식당을 운영하는 것이 돈이 목적이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우리는 여자 사장님을 권사님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남편은 장로님이고 장로님은 식당의 모든 식재료들을 시장을 보고 저녁이 되면 부인과 교대하면서 저녁일을 마감한다.


어느 날부터인가 장로님의 음흉함이 느껴졌다. 손님이 없는 곳에서의 허리에 쓰윽 들어오는 손에 너무 놀라 보면 장로님의 우악환 손이었다. 예전 스쳐 지나가듯 손의 허리 근처에서의 놀림이 실수가 아니라는 것이 증명이 되었다.

변태를 다루는 건 그 앞에서 여성의 나약함과 여성성에서 나긋나긋한 말투나 웃음은 금지하면 된다. 눈을 마주치는 행위는 안 하기로 했다. 눈을 마주치면 나도 모르는 경멸함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둘이 있을 때 사장님이지만 투명인간 취급하기로 한 것이다. 다른 여자 유학생들은 그런 나를 이상하게 생각을 하였다. 너무 민감한 것 아니냐며 오히려 장로님을 옹호하기까지 하였다.

이상했다. 내가 아는 다른 유학생들은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이다.


얼마 후 풋풋한 한국 유학생의 20대 중반의 그녀는 상큼하고 싱그러움이 식당의 분위기를 한껏 업시켜주고 텐션이 좋은 만큼 사람들이 그녀를 좋아했다. 같은 학교이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에 친해졌다. 그러다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장로님의 행동이 너무 불쾌한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어느 날 나에게 와서 고백을 하였다. 손가락 하나로 옆꾸리 언저리를 쓸어서 만진다고 하였다. 일한 지 얼마 안 된 그녀는 낯섦 때문에 말수가 적었고 활발한 그녀의 성격을 친하지 않다는 이유로 머뭇거리는 것을 알고 난 내가 경험한 사건들을 알려주고 그녀에게 장로님과의 더 이상의 눈 맞춤을 자제하라고 주위 친구들과 얼른 친해져서 눈치 볼 상황을 만들지 말라고 했고 곧 그녀는 자신 안의 활발함을 양껏 끌어올려 일할 때 더 이상의 장로님의 음흉한 행동은 없었다고 한다.


독일 문화중에는 서로를 조금이라도 터치를 하는 것도 실례이기 때문에 실수로 부딪히더라도 미안하다고 하고 고의가 아니었음을 알리곤 한다. 독일에 사신 지가 30년이 다 되었는데도 받아들이가 힘들었던 모양이다. 요즘 한국도 터치하는 것이 실례인 것을 한국 유학생들로 인해 알게 되었을 것인데 그것을 지키지 않기라도 한 듯 그분들의 목사님한테도 반박을 했다.

교회에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목사님 눈에도 여자 성도들을 너무 쉽게 만지고 허그하는 장로님의 모습이 걸리셨는지 여자 성도들을 교제를 한다는 이유로 만지는 것을 자제해달라고 설교가 마친 후 방송으로 알렸다. 장로님은 그 말이 불편했는지 따뜻한 교제를 위해서는 허그와 악수는 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뜻함을 전하기 위해 신체적 접촉을 해야한다? 편안함과 따뜻함은 같은결 아닌가?


권사님은 막내로 자라나서 장남인 남편을 만나 슬하에 아들 한 명을 두고 같은 독일에서 떨어져 지내면서 살고 계시는 분이셨다. 광부나 간호사로 독일에 온것은 아니고 인쇄기술이 당시 독일이 한국보다 좋았기 때문에 인쇄쪽 일로 한국을 오가며 신앙생활을 하며 독일에서 일하는 분이셨다.

한인식당에서 일하면서 언젠가부터 여자 사장님의 결이 보였다. 교회를 가실 때는 명품으로 치장을 하고 단 한 번도 같은 옷을 입기를 원하지 않는 겉에 두르는 것으로 본인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생일날 며느리가 백을 선물한 것을 물어봐줄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랑하시곤 하였다. 남편은 장로님이고 교회에서 헌금을 제일 많이 낸다는 이유로 장로님 부부는 바뀐 지 얼마 안 된 목사님 내외분의 말들은 그냥 넘기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였다.

식당에서 세금을 안내기 위해 하루 수입의 반을 현금으로 받는 그래서 학생들에게 제일 먼저 일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이중 장부를 적는 법이다. 카쎄(현금을 받아서 넣는 기계)에 찍히는 영수증의 흔적을 감추기 위해 돈을 따로 받으려면 규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장로님인데 저렇게 정직하지 않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다며 뒤에서 얘기하는 학생들의 뒷담화는 당연하다. 처음엔 20%의 현금 모으기는 50%가 넘어가는 날들이 허다했다. 한국음식이 싸이때문 유명해지면서 입소문에 장사는 날로 잘 되어갔다. 하루 매상이 날로 늘어갈 무렵 식당의 탁자는 많아지고 독일 사람들은 한국의 음식을 많이도 찾았다.

어떤 이에게는 돈이 많을수록 인간의 욕심도 많아지기 마련이다.

하루 매상이 4000유로라면 2000유로까지 돈을 빼라는 규칙을 만든 것이다. 그러다 매니저가 너무 한거 아니냐며 한마디를 하면 눈치를 보지만 상황은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예전으로 고수시킨다. 그 돈으로 아들 내외의 식당을 차려주고는 정말 뿌듯해하셨다. 한 여름 에어컨이 없는 것에 돈 좀 쓰라는 매니저의 말에 손님의 회전율이 미비할까를 우려해 에어컨을 설치 안한다고 했다. 시원하면 자리에 앉아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말이다. 직원들이 한 여름 매출의 배를 달성시키는데 그 어떤 보너스도 없고 더워 선풍기를 틀으면 김밥이 마르니 선풍기를 끄라고 한다. 더위 먹어 집에 가면 구토를 하기가 일쑤다. 직원들의 건강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 어떤 희생도 감수하라는 갑질의 연속이었다. 얼마전 일억 가까이 되는 아우디를 뽑았다며 자랑까지하면서 말이다.

그 안에 그 어떤 선한 열매는 없다.




나의 언니와 조카는 내가 있는 독일에 와서 조카의 새로운 미래를 의해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조카에게서 황당한 사건이 장로님과 연관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예전 나의 어릴 적 상처도 생각이 나면서 나의 조카에게 함부로 손으로 수치심을 주었다는 것이 용서가 안되었다. 여자들의 뒷목을 주무르면서 만지는 행위는 16살에겐 엄연한 성희롱이다.

교회에 간지 첫 주가 지난 둘째 주부터 장로님의 변태적 성향은 쉬는 시간이라고 교제 시간을 주는데 저 멀리에서 의자에 부딪혀 쿵 소리를 내면서까지 달려와 나의 조카를 반기는 척하며 뒷목을 주무르는 행위가 또 반복이 되었다. 그러다 조카는 이상하다 생각이 들었고 5번이 반복될 무렵 조카는 교제시간이 끔찍해서 화장실로 대피해 있었고 이게 아니다 싶어 엄마한테 얘기했고 언니는 나에게 얘기했다.

난 그 교회를 소개해준 것이 너무나 후회가 되었고 식당이 아닌 교회에서 10대를 상대로 장로님을 행동을 고발하고 싶었다.

언니는 내가 일할 때가 없어서 그 교회에서 분란을 일으키면 나에게 해코지를 할까 봐 노심초사한 것이었다. 세상과의 타협은 이럴 때 하는 것은 아니다. 타국에서의 이런 횡포들 앞에서 유학생 및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보호해줄 법이나 울타리가 없기 때문에 덮어두거나 넘어가거나 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가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것은 어른의 책임이다


난 바로 목사님 내외분께 사실 그대로 알렸고 내가 다니는 목사님 내외분께도 알렸다. 결과가 바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손해를 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목사님들은 나의 이런 상황을 처음에는 위로를 해주시더니 곧 책임을 전가시키려는 말로 나의 이런 행동을 더 이상 퍼뜨리지 말라고 하셨다. 도의적인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한 면을 보게 되어 씁쓸하였다. 추악한 행동을 하는 자앞에서 행동을 더 이상 하지 말라는 그들의 말에 본질의 소중함을 더 알게 되었다. 그분들의 위치나 가정을 거기서 꾸려나가야 함을 알기에 도의적 책임보다는 나의 회피를 강요하였다.


언니는 장로님께 바로 그런 행동을 자제해 달라고 알렸다.

“장로님 나의 딸은 예민한 아이고 사춘기인데 제 남편도 못 건드리게 할 정도예요. 앞으로 만지거나 손을 잡는 행동은 하지 말아 주세요. 아이가 불편해하고 있어요.”

장로님은 무엇이 잘못된 것임을 인지하고 나오는 답변은 전형적인 변명을 도구로 삼기 시작했다.

“내 딸 같아서 그랬다.”

1980-90년대 한국은 남자들이 여자 아이들을 이쁘다고 만져놓고 아이의 심리적 상태는 전혀 고려치 않고 내지르는 행동들이 분명 난무하였다. 그것들의 결과는 언제나 성희롱과 성착취와 남성의 권위적인 면을 악용하는 문제로 인해 시대가 바뀌어 낡은 관습이 여성의 몸과 마음을 해치는 시대를 상대로 여성들의 목소리를 높여서 그들의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꼬집느라 반세기를 지나고 있다.

난 이것이 비단 나와 나의 가족의 문제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시대는 변해 그런 사회적 문제는 결국 미투 운동으로 번졌고 어떤 작가의 과감하고 용감한 고발로 사회는 개념을 바꾸기 시작했지만 한국이 아닌 한인 사회들은 아직도 옛날 방식을 고수하면서 살고 있다.


우연히 읽은 니체의 찌라투르스는 이렇게 말하였다에서 남성은 세상에서의 성취에서 가장 큰 행복을 누리고 여자는 그런 남자에게 사랑받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하였다. 니체가 말한 정신적인 것을 경멸하는 육체적인 것을 숭배하는 사상의 영향인가?

크리스챤들은 성경대로 살기를 원하지만 육체적 욕망을 아무 거리낌없이 하는 행동에 양심이라는 내면의 목소리로 다스리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교회의 직분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더욱더 조심하고 살아가는 것은 시대가 변해도 진리가 변하지 않듯 스스로를 죄의 울타리에 가두지 말것을 성경을 명령한다. 선한것을 좇으라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합리적이지 않은 행동들에 변명과 합리화로 서로서로 돕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난 나의 일터가 아이의 심리적 혼란함으로 인해 받는 수치심을 좌시하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일자리는 또 구하면 되는 것이다.

어른이라고 난 변태적 성향을 제어할 수 있는 컨트롤이 있었지만 10대는 처음 겪는 일이라 그 안의 혼란함과 수치심은 말 안해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언니에게 그 교회에서 당장 나오라고 했다.

언니는 나를 위해 금방은 안된다고 했고 난 조카를 위해 언니가 나와야 한다고 했다. 언니는 단비와도 같은 설교를 뒤로하고 그 교회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열매가 없고 절제가 없는 음란한 장로님의 행동은 나의 고발로 주춤하면서 갑과 을로 보다 수위 높은 경계를 하였다. 예상했던 바라 난 그들의 행동은 관찰하기 시작했고 잘릴 각오로 그들의 치졸한 뒷면을 보기로 하였다.

양심이 있으면 죄책감이 있을 거라던 나의 판단은 오산이었다. 양심은 아주 소중한 마음이라 양심도 사람 따라 가는 것 같았다. 그들은 보란 듯이 그들 교회의 목사님을 식당에 초대해서 맛있는 점심으로 한상을 차려주시곤 본인의 허물들을 덮는 행동을 하였다. 치졸하면서 어리석고 연약한 습성이다. 난 화가 너무 났다. 인간의 부조리를 많은 시간 동안 겪었던 터라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여자들에게 남성성의 욕망을 채우려는 그 외의 그 어떤 말도 생각이 나지 않을 무렵 난 친한 동생한테 일을 털어놓았다. 동시에 장로님과 권사님이 다니는 교회 목사님께 사실을 그대로 알렸다. 목사님은 팩트 체크만 하시고 내가 말한 사실들을 이미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여자 성도들을 안거나 손을 잡는 행위를 하지 말아 달라고 몇 번이나 방송을 했다고만 하였다. 사모님은 안타까운 마음에 울기만 하였다. 어떻게 해달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의 가족이 처한 상황에 대해 장로님 대신 용서라도 비는 모양새였다.

이럴 때 쓰는 단어가 마땅히 생각이 나지 않는다. 오만함일까 교만함일까 비양심적이라고 하는것이 내가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할수 있는 여지의 최선책 같았다. 여기서 난 외면을 해야 함을 뼈저리게 알고 있기에 그들과의 오랜 시간들을 지우기로 하였다.


그러다 어떤 한 여자분의 새로운 동료로서의 만남이 있었고 아들이 한 명이 있는 그녀는 장로님과의 오래된 인연으로 식당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날씬하고 순수하고 여자로서의 풍기는 이미지가 항상 웃음을 나게 만들었다. 그녀와의 일을 하게 되면 힘들지만 그녀의 텐션으로 일이 귀중한 노동이 되었고 그녀의 섬기는 행동들은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 그녀와 친해지게 되었고 그녀의 해맑음이 사라진 게 이상해서 조용히 물어보게 되었다. 그녀는 장로님의 이상한 행동을 느끼고 엄청 힘들어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와의 대화는 곧 그녀의 행동을 변하게 만들었고 장로님과의 단 둘이서 의 공간에서는 알아서 다른 사람이 들어가서 일하게끔 하였다.




어느 날 나의 머리 위에 안수기도를 하려고 하던 찰나 장로님께 이렇게 말하였다.

“안수기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안수기도를 하지 말아 주세요.”

경솔하지만 참지 않고 말히였다.

난 그분의 행동이 장로의 직분을 감당하는 습관적인 행동 같아서 오히려 나의 영혼에 해가 된다고 여겨 그의 종의 탈을 쓰고 폭력을 휘두르는 것에 분노를 하였다.

그렇게 난 계속되는 그분의 비겁하고 치졸한 행동을 보면서 그분의 페르소나 같은 에고에 돌을 던진 것이다.

나의 소중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이보다 더한 것도 할 요량으로 말이다. 한 영혼이 평안을 찾아 온 발걸음을 내친것에 돌을 던진 것이다.

그 돌은 그 사람에게 어떤 영향도 없지만 에고가 더 커지기 전에 이 돌은 분명 꿈틀거림이 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학교 후배인 아는 동생의 법적 대응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탄을 하게 되었다. 다른 식당의 한인 사장의 성회롱으로 인한 법적 대응이었다. 가슴을 만진 사건이었는데 같이 일하는 남자 동료의 도움으로 증인과 법적 증거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사장과의 장로님의 인연도 꽤 있었다고 한다. 장로님의 도움으로 그 사장은 한인 식당을 운영하게 되었다고 했다. 사람은 끼리끼리 만난다고 하던가.


사람들의 표면적 믿음은 본인들의 허물들을 되돌아보지 않고 사과도 없이 핑계와 변명으로 합리화시켜 덮어버린다. 그런 믿음은 그들에겐 무기인 것이다. 허물은 그런 것들로 덮는 것이 아님을 진정 모르기 때문이다. 진실을 외면해야 사는 인간의 본능의 또 다른 가면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종종 나타나는 행태이다.

교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뉴스에서는 많이 접했던 터라 덤덤했지만 내가 아는 사람이라 다소 허망하기는 하다. 본질을 바라봐야 하는 이유는 이런 문제들 때문이다. 사람은 신앙생활을 할 때 보통 사람을 보고 믿음이 성장하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데 본질을 좌시하면 다닌 지 오래되지 않은 사람, 분별이 없는 사람은 교회에 대한 안 좋은 시선들로 인해 떠나가게 된다.


내가 지나온 과거에서의 시간들의 경험이 분별을 알게 되었다.

어떤 이는 주님의 종은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엄연한 죄이고 믿음의 탈을 쓰고 저지르는 더 조악하고 영리한 영일 뿐이다. 모든 종들이 하나님께서 기쁘게만 바라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나의 분별력은 때론 비뚤어지고 어그러진 타인을 관대하게 포용할 수 있게 하지만 때론 포용이 아니라 무관심으로 기도를 하게도 만든다.

세상에서는 서로 자기의 빛이 더 밝다고 아우성치고 덜 밝다고 하는 사람들의 빛을 꺼버리기까지 하는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사람들의 마음들이 나의 미간을 자주 찌뿌려트린다. 사람의 빛은 서로 어우러져야 참된 건데 그래야 익숙해버린 아침의 빛처럼 언제나 그랬듯이 어둠을 밝힐 줄 아는데 말이다. 내가 켰다 바로 꺼버린 전등처럼 누가 켜지 않으면 빛을 낼 수 없다. 내 마음의 등불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의 촛불은 밝지 않지만 모이면 밝듯이 사람의 등불은 꺼지기 전에 밝혀져야 한다. 거친 세상 속 어그러짐으로 꺼질 촛불들이 기쁨으로 본연의 작은 빛으로 서로의 부족함이 채워지는 사람들과의 시간들이 그립다.


낡지 않으려면 거침없는 고집 있는 긍정보다는 진실을 동반한 솔직함이 우선되어야 함을 안다.

종교는 그들이 믿고 있는 자신의 쓴 뿌리를 마주 대하기 힘들어 긍정이라는 탈로 합리화하고 인정까지 받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일방적 사고방식의 타인의 생각이나 마음을 좌시하는 생각들은 성경에 하나님의 절대적 약속이나 예언들처럼 본인의 배타적인 행동이 언제나 유익이 된다고 여겨 흘려 넘친다고 여긴다.

그리고 주님의 종은 하나님의 택한 종이라고 자기의 오만함을 자랑하는 자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선과 악과 무엇을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흐려서 켜놓은 조명등이지만 두 개의 빛이 어색해버렸는지 왠지 나의 미간을 찌뿌려뜨리는 내가 켜놓은 밝은 조명등을 껐다.

이제야 편안함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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