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nowme Mar 14. 2021

이제부터라도 적당히 살기로 했다

#대충이 아닌 적당히

욜로가 라이프스타일로써 열풍을 일으킬 때,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는 무책임하게 행동하는 자신의 삶을 포장하기 위한 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당시 미디어는 욜로를 즐기는 ‘2030’ 세대가 사회적 문제가 되리라고 떠들어댔다. 나도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인 한 사람이었다. 사회는 우리를 부단하게 다그쳤다.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야 하고, 맡은 일에 몰입하는 게 미덕이라고.


흥미롭게 본 애니메이션 가운데 지금까지 뇌리에 남아있는 캐릭터의 좌우명이 하나 있다. 모두가 청춘의 주인공이기를 바라지만 그는 눈에 띄지 않는 엑스트라이길 원했다. <빙과>의 남자 주인공인 오레키 호타루 좌우명은 이랬다. “하지 않아도 괜찮은 일이라면 하지 않는다. 해야 하는 일이라면 간략하게.”

 

물론 맞닥뜨리는 모든 일에 “신경 쓰여요”라고 말하여 뛰어드는 여자 주인공인 치탄다 에루를 만난 호타루는 자신의 좌우명을 끝내 행동으로 지켜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만화 속 호타루가 끊임없이 되뇌는 좌우명은 나에게 던지는 바가 컸다. 적당히 사는 게 과연 옳지 못한 일일까.


적당히 사는 것과 대충 사는 것은 엄연하게 다르다. 적당히 사는 것의 방점은 덜 휘둘리는 데에 찍혀있다. 신경 써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은 세상이다. 이중 들이닥치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면 금방 지쳐버린다. 몰입해야 할 일과 가볍게 넘겨도 되는 걸 구분해서 행동하는 게 내가 생각하는 적당히 사는 방법이다.



지금까지 적당히 살지 못했다. 일, 인간관계, 연애 등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 안테나를 곤두세웠다. 특히 연애는 종종 나를 힘들게 만든 원인이 됐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했던 나는 연애를 하면서도 일과 인간관계를 등한시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오만이었다. 언제나 시간은 한정적이었고, 모든 것에 열정적일 수 있다는 의욕은 사라져만 갔다.


돌이켜보면, 나의 이십 대는 옅은 경계의 연속이었다. 무엇하나 칠칠하지 못했다. 연애에 최선을 다했다고 자신했지만, 한 해를 넘기기 쉽지 않았다. 인간관계도 잃고 싶지 않아, 여력이 되는 한 모임에 참석했다. 그러나 친구들은 불평을 늘어놓았다. 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따금 미디어에 노출되는 ‘알파보이’, ‘알파걸’은 상상 속의 동물이지 않을까, 푸념했다.


결국 한 가지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를 마주하게 됐다. 이제는 덜 휘둘리기로 했다.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도 삶을 살아가는 용기라고 자신한다. 앞서 말했지만, 적당히 사는 건 대충 사는 것과 다르다.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은 너무나도 많다. 덜 신경 써도 되는 일에 괜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로 했다.


지금까지 나를 사랑하는 법을 모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걸 잘할 수 있을 것이라던 나의 스무 살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이는 살아가는 데 동기부여를 주기도 하며, 이십 대만의 특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서른이 넘으며 걸어온 길을 되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적당히 좋아하고, 적당히 살아갈 수 있는 성숙함을 얻는 건 삼십 대만의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하마터면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할 뻔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