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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owme Jun 25. 2022

벚꽃과 겨울

1-1

 의도치 않았지만 나에게 마지막 헤어짐이 돼버린 그 관계를 끝으로 나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게 아닌가, 라고 생각한다. 어렴풋이 이유에 대해서는 짐작한다. 나의 감정을 '잠작'이라는 단어로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주말에 여의도에 벚꽃이 만개할 거라네요. 벚꽃구경 어때요?' 그는 말했다.

'저는 어디든 좋아요. 편하신 데에서 만나요.' 나는 답했다.

나는 메신저로 그와 소개팅 약속을 잡고 있었다. 당시 나는 서울에서 다소 먼 지방의 도시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서울까지 올라가려면 세 시간은 넘게 걸리는데, 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에게 괜찮다고 말한 이유는 답답한 이곳에서 잠시만이라도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학생 때는 몰랐다. 취업에 성공하면, 모든 고민이 끝날 것이라고. 하지만 매일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A에게 연락이 왔다. 같은 동아리의 오빠가 자신의 친구를 소개해줄 사람이 없냐고 물었다 했고, A는 문뜩 내가 떠올랐다고 했다.

20대 중반에 접어들었지만 연애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A의 제안이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로 생긴 파처럼 잿빛 같은 나날을 깨뜨릴 유희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남자와 만난다는 건 나에게 엄청난 도전이었다. 여중 여고는 물론이며 대학교도 인문대를 졸업한 나에게는 남자와의 만남이 익숙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학교 때도 남자 동기보다 여자 동기들이 월등하게 많았고, 소심한 성격 탓에 남자 동기와는 친해지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무척이나 삶에 권태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 해볼게.' 나는 말했다.

'오빠한테 말하고, 소개팅남 연락처 받으면 알려줄게.' A는 답했다.


 며칠이 지났을까. 행복하지도 그렇다고 불행하지도 않은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소개팅을 제안받았다는 사실조차 희미해져 갔을 때였다. A는 소개팅에 나올 동아리 오빠의 친구가 갑작스럽게 거절을 해 동아리 오빠를 소개해 줘도 괞찼냐고 물었다. 부담스러우면 안 해도 된다는 말과 함께. 사실 일면식도 없었기에 누가 소개팅남이 되어도 나에게는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A는 동아리 오빠의 친구 연락처가 아닌 그의 연락처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는 최겨울이라고 해요." 그는 말했다.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벚꽃과 여느 때와 다름없던 봄의 오후는 그의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듯했지만, 북적이는 여의도 윤중로에서 나의 앞에 서있을 사람이 원래는 겨울이 아니었으리라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이것이 옳을지 모른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오버핏의 베이지색 셔츠와 검은색 슬랙스를 입고 내 앞에서 인사를 건넨 겨울은 체형이 마른 편이라 키가 무척 커 보였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170cm 중반 정도였다. 그날 여의도 윤중로는 벚꽃보다 사람이 많았고, 수많은 인파 속 우리는 두 개의 작은 점에 불과했다.


 우리는 널찍한 돗자리에 커피 한 잔씩을 손에 쥐고 앉았다. 모르는 사람 더군다나 남자를 만나는 자리가 어색했던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대화를 시작한 건 겨울이었다. 겨울은 소개팅을 주선한 A에게 외롭다고 주변에 좋은 친구 없냐고 보채어 나를 소개받게 됐다고 했다.

 원래 겨울의 친구가 이 자리에 나왔어야 했다는 걸 알았던 나는 속으로 피식 웃으며 애써 모른 체했다. 굳이 겨울을 불편하게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고, 겨울을 만난 마당에 앞선 사실은 나에게도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의 모양새는 누구 봐도 소개팅으로 만났구나, 하는 분위기가 느껴질 정도로 경직이란 단어와 맞닿아있었다.


 겨울은 나보다 네 살 연상이었다. 소개팅을 어색해하는 나를 위한 것인지, 윗사람이 자리를 주도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일반적 통념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겨울은 대화가 끊기지 않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나는 겨울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반응을 열심히 했다.

 "회사에서 막내이시죠? 여기저기 치여서 너무 힘드실 것 같아요. 저도 팀에서 막내인데, 다행인 건 외부에서 혼자 하는 업무들이 많아서 한편으로 숨통은 틔어요." 겨울이 말했다.

 "네, 저도 사회생활이 처음이라 적응하기에 바쁘네요. 겨울 씨는 퇴근하고 뭐하면서 쉬세요?" 나는 말했다.

 겨울은 업무의 특성상 일과의 시작이 불규칙적이라고 했다. 이른 오후에 일이 시작되기도, 때로는 새벽에도 일을 할 때가 많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꾸준히 취미를 이어가기 어렵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주말에도 일을 할 때가 많아 평일에 쉬기도 한다고. 오늘은 주말에 휴무일을 만들어 소개팅을 나왔다고 했다.


 겨울은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있었는데, 그래도 벚꽃구경을 왔으니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제안했다. 나는 다음 주면 떨어져 내릴 벚꽃을 배경으로 어색하게 섰고, 겨울은 카메라의 이것저것을 만지고 있었다. 소개팅 그것도 첫 만남에서 소개팅녀의 사진을 보통 찍어서 주기도 할까, 라는 생각을 하는 찰나 겨울이 손에 쥔 카메라의 셔터 소리가 들렸다.

 "잘 나왔어요. 어때요? 제가 보정해서 메신저로 보내드릴게요." 겨울은 말했다.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나는 저녁을 먹자고 했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빠져나와 조용한 장소로 가고 싶었다. 겨울은 근처에 자신이 졸업한 모교가 있고, 자주 가던 펍이 있다고 했다. 주말이라 학생들도 많지 않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겨울의 대학교 생활이 묻어있는 펍은 주말이어서 그런지 한산했다. 우리는 소개팅으로 만나고 있어요, 라는 부끄러움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않을 듯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익숙한 장소에 도착한 겨울은 대화를 편하게 주도하기 시작했다. 내가 보고 있는 드라마의 스토리가 현실적이라서 재밌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겨울은 본가를 떠나 자취를 하며 겪었던 어려움과 더불어 나의 외로움을 공감해줬다. 나중에 겨울에게 물어봤을 때, 겨울은 한 번도 자취를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자취 10년 차는 되는 듯한 공감력은 지금 생각하면 혀를 차게 할 정도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하늘은 검은색 물감을 칠한 듯 어둑해져 있었다. 나는 지금 집으로 출발을 해도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야 도착을 할 수 있겠네, 하며 생각했다. 하지만 소개팅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경험이 없던 나는 이 자리를 끝맺음을 하지 못했다. 결국 핸드폰을 꺼내 애플리케이션으로 기차 시간을 보며, 겨울에게 은연중 눈치를 줬다. 겨울은 나의 행동을 알아차렸는지 역까지 데려다준다고 제안했는데,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첫 소개팅의 어색함으로 어지러움을 느끼고 있는 자신에게 혼자만의 시간이라는 약을 건네고 싶었다. 펍에서 나온 우리는 인사를 하고, 있을지 모를 다음의 만남에 대해 언급하며 헤어졌다. 나는 택시를 타고 영동포 역으로 향했다. 

 이내 집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고, 영등포역에서 출발한 기차는 수원역을 지나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창가 자리에 앉아 첫 소개팅을 소회 했는데, 이 정도면 처음치고 잘 해낸 게 아닌가, 생각했다. 이성과 대화한다는 건 언제나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오늘 정도면 괜찮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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