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의 열네 번째 단어 : 여행
여행은 어렵다.
한 번 여행을 떠나려면 많은 검색과 준비가 필요하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날밤 침대에 누워 여행을 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적도 여러 번이다. 공항으로 가는 길은 설레는 마음보단 두려운 마음이 크게 자리했다. 혹시 길을 잃진 않을지, 휴대폰을 잃어버리진 않을지, 친구와 싸우거나, 소매치기를 당하진 않을지 가능한 변수에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걱정하는 것은 내 전문이었다.
그럼에도 늘 여행을 그리워하고, 여행을 좋아하냐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답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여행지에서의 내가 그립기 때문일 거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여행들은 완벽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은 엉성했고 유치했다. 런던으로 떠나는 여행길에는 괜히 오아시스의 대표곡들을 꺼내 들었고, 흔한 거리 간판을 카메라에 담았다. 매일 길을 잃었고, 맛없는 저녁을 사 먹었다. 그칠 줄 모르는 비에 쫄딱 젖으며 처음 보는 거리를 걸었고, 한 달짜리 짐이 들어있는 캐리어를 잃어버렸다. 잦은 실수와 빈틈들에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만보씩 걸었던 고된 하루도 작은 게스트하우스 방에 돌아와 드러누우면 모든 게 다 괜찮아졌다.
좋아하는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살면서 생기는 모든 빈틈을 미친 사람처럼 일일이 채우며 살아갈 수는 없어. 그 말을 들은 주인공은 평소 같은 멍한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기만 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여자 주인공이 답답했지만 왠지 밉지 않았다. 우리는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빈틈을 메우는 것은 안정을 만들려는 노력이야. 빈틈을 채우며 살아가는 것은 흐르는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으려는 노력이야. 혼자 대꾸해보았지만 어쩐지 진 느낌이 들었다.
서울의 나는 어색한 침묵이 싫었고 증명이 필요했다. 모든 것엔 이유가 필요했다. 내가 나를, 나의 감정을, 만들어낸 선택에 합당한 이유를 붙여 설명할 수 없다면 최선을 다해 살아가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흐르는 시간을 열심히 살아낸다는 착각을 하며 끊임없이 변명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행을 하면서 나는 변명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빈틈이 가득한 허술한 여행이었을지라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빈틈이 있어도 그곳으로 굴러들어 오는 우연이면 충분했다. 채워질 수도 영원히 비어있을 수도 있지만 아무렴 괜찮았다.
by.D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