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잔잔 janjan Aug 24. 2021

22. 벌레와 아빠

잔잔의 스물두 번째 단어 : 벌레




아직까지도 극복하지 못한 나의 커다란 두려움은 바로 벌레다.


 

2N 년 살아온 다 큰 어른인데도 벌레, 특히 바퀴벌레만 보면 머리 끝까지 소름이 끼친다. 글씨로 쓰는 것도 싫다. 거기다 눈은 왜 그렇게 좋은지 다른 사람들은 못 보는 벌레를 늘 나만 발견한다.  평생을 저층 주택에서 살았던 나는 죽을 만큼 싫어도 벌레를 마주할 일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보단 훨씬 많았다.  마당이 있고 옥상이 있는 집은 어쩔 수 없이. 필연적으로 벌레를 마주했다. 어쩔 수 없이.  언젠가 책을 보는데, 작가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바퀴벌레를 실제로 본 적이 없다고 하더라. 그럴 수가 있나...! 여름이 시작되면 언제 벌레를 마주칠까(?) 걱정하는 나는 그 사실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보는 것만 해도 소름이 끼치치는데, 당연히 잡는 일은 상상도 못 한다. 벌레를 마주했을 때 해결방법은 언제나 아빠를 부르기. ( 엄마도 부탁하면 잡아주긴 하지만, 엄마도 벌레를 싫어하기 때문에 눈치가 보인다. ) 아빠는 왜 벌레를 무서워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중 하나다 커다란 벌레도, 이상한 곤충도 손으로 덥석 덥석 잡는다. 벌레를 잘 잡는지 문 뒤에서 흐린 눈을 하고 지켜보는 나에게 늘 쟤가 널 더 무서워할 거야라고 말하면서. 아빠에겐 왠지 조금 미안하지만 벌레를 보면 아빠가 떠오른다. 유일하게 맨손으로도 덥석 잡아줄 사람이기도 하고, 내 기억 속에 아주 아주 강력하게 새겨진 일이 있기 때문이다. 아빠는 모르겠지만 아빠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일.





고등학교 3학년 때 나는 매일 밤 열두 시까지 독서실에서 공부를 했다.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곳이었는데, 매일 열두 시에 맞춰서 엄마나 아빠가 매일 나를 데리러 왔다. 이 정도는 혼자 다닐 수 있다고 오지마라고 아무리 말해도 에잇! 안돼! 하면서  매일매일 독서실 건물 앞에서 나와 동생을 기다렸다. 보통 차를 타고 데리러 왔지만, 가끔 밤 산책 삼아 걸어올 때가 있었다. 그날도 아빠가 걸어서 나를 데리러 왔다. 동생은 무슨 일이었던가 집에 먼저 갔었고. 나와 아빠는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고, 시답지 않은 얘기를 나누며 걸었다. 더운 여름밤이었다. 집까지 몇 미터 남지 않았을 때 큰 위기가 찾아왔다. 큰 바퀴벌레 두 마리가 우리가 지나가야 할 길 중간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것. 기억이 왜곡되었을진 몰라도 정말 컸다. 정말!  벌레를 겁먹은 나는 도저히 저 길을 못 지나가겠다고 다른 길로 삥 둘러가야겠다고 아빠에게 징징거렸다. 아빠 입장에선 넓은 길에, 커봤자 손가락보다도 짧은 게 뭐가 무섭나 싶었겠지만 말이다. 집 앞까지 스무 걸음 정도를 남겨두고, 철딱서니 없는 딸을 위한 아빠의 선택은 정말 웃기게도 나를 업어주는 거였다. 163cm에 인생 최대 몸무게를 찍었던 고삼 시절 벌레가 무섭다고 아빠에게 대롱대롱 업혀서 대문 앞까지 옮겨졌다. 뭐가 무섭냐고 혼자 갔을 수도, 조금 다정하게라면 다른 길로 돌아가 주거나 혹은 먼저 가서 벌레를 쫓아줄 수 있었을 텐데.  도대체 뭐가 무서우냐고 얄밉게 놀리면서도 아빠는 나를 업어주었다. 아빠를 생각하면 이 일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나중에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르더라도 이 날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나는 늘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아빠를 설명할 때 내가 본 사람 중에 제일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혈액형 별 성격은 순 미신이지만, AB형의 설명이 딱 들어맞는 이상한, 살짝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 낚시꾼, 극강의 외향형 (하지만 알쓰), 채집꾼, '괜찮아 안 죽어'류의 인간, 소소한 희망은 <나는 자연인이다> 출연인 조금 시끄러운 아저씨. 바다로 여행을 갔을 때 내가 쓰던 작은 아동용 물안경을 쓰고 쇠숟가락을 들고 깊이 잠수해서 굴인가 전복인가를 잡아왔던 사람. 작은 물안경 때문에 얼굴에 눌린 자국이 뻘겋게 남은 채로.

따뜻함 애틋함 다정함보다는 이상하고 웃긴 사람. 아빠의 모든 점을 사랑할 순 없지만, 가끔은, 아니 솔직히 자주 아빠를 보면 "왜 저래"라는 말이 먼저 나오기도 하지만.  그냥 평생 유치하고 이상했으면 하는 사람이다.



by.DD



작가의 이전글 22. 또 쫓겨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