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ea Dec 19. 2022

엄마와 딸의 수포자 해방 일지

위기는 기회가 되고


우리 딸은 수학을 싫어한다. 수학책을 펴면 화가 난다고 했다. “아, 뭐야. 이렇게 쉬운 걸 계속 반복하라고.” “왜 자꾸 소리 내서 읽으라고 하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재미없어요.” 쉬우면 쉬워서, 어려우면 어려워서 싫어했다. 난이도가 적당해도 지루해했다. 처음에는 어렵지 않게 딸을 이해했다. 내게도 학창 시절 수학을 싫어하게 된 여러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딸은 좀 달랐다. 수학 공부 안 한다고 다그치는 사람도, 답을 틀렸다고 꾸짖는 사람도 없었다. 학교에 다니지 않으니 딱히 비교할 사람도 없었다. 처음에는 아이가 이해도 되고 안쓰럽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의 격한 감정 표현을 계속 보고 있자니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수학 공부하기 싫으면 지금 안 해도 돼. 잠시 쉬었다 해도 괜찮아.” 엄마의 진심은 딸에게 소용없었다. 아이는 자신의 이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수학책을 펴고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아이 옆에서, 성취감과 흥미를 느낄만한 방법을 찾으려 나도 애썼다. 선생님이자 엄마로서 만만치 않은 문제였다. 어느 때보다 나의 몫이 커 보였다. 난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조심조심 애를 썼다.     


“딸, 수학 공부하느라 정말 애썼어. 엄마는 네가 수학 공부를 지금 꼭 해야만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억지로 공부하는 것은 너에게 도움이 되지 않아. 지금 그 마음으로 한 문제를 더 풀고 답을 맞히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다시 공부할 마음이 생겼을 때, 천천히 해도 돼.”  


“그래도 지금 안 하면 진도를 놓치잖아요.” 


“9살이라서 반드시 2학년 수학을 해야 된다는 법도 없어. 너의 속도대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야. 지금 꼭 연산 공부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실제 수학은 연산만을 의미하지 않는대. 하나님이 만든 세상 안에 질서가 수학이래. 우리 식물 잎이 차례대로 나는 것 봤지? 그때 재밌었잖아.” 


“맞아요. 잎 관찰하는 거 신났어요.”


“수학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걸 알고 나서, 엄마는 수학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어. 그 질서를 종이 위에 옮겨 놓은 것이 수학책이라고 생각해. 내용을 이해하고 문제를 푸는 건 물론 어렵지만 이를 통해 분명 네 생각이 넓어지고 깊어지게 될 거야. 보다 분명한 논리로 하나님의 질서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겠지. 또 나중에 꿈을 이루고 어떤 분야를 깊게 공부할 때에도 필요하지 않을까?”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해요.”


“마지막으로, 네가 실패했다고 느끼는 감정은 사실이 아냐. 다시 시작하기 위해 잠시 쉬며 준비하는 기간이야. 속상할 때는 엄마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편안한 마음이 들게끔 노력해 보자. 또, 지금 수학 공부를 하든 안 하든, 수학을 잘하든 못하든 간에 너는 변함없이 가치 있고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꼭 기억하면 좋겠어. 좋아하고 배우고 싶은 분야에 더 몰입해 보자. 엄마는 항상 같은 마음으로 널 사랑하고 응원해.”    

  

난 몇 달 동안 아이에게 비슷한 말을 했다. 하지만 아이는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펑펑 울기도 했다. 새침하게 등을 돌려 가버리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먼저 내 아량을 넓히셨다. 서른 살이 넘어서도 어렵고 하기 싫은 건 최대한 미뤄보는 나. 아이는 더 할 것이다. 고작 열 살도 안 된 아이에게 이해와 공감 아니면 무엇으로 다가가리오. 따뜻한 시선으로 아이에게 버팀목이 되어야 하는 건 당연했다. 공부하는 이유를 되새기는 계기도 되었다. 홈스쿨러로서 검정고시가 코앞이라고 의무감에 하는 공부는 싫었다. 딱 턱걸이로 합격할 만큼 준비하는 얄팍함, 합격한 뒤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을 매정함을 가진 채 공부하는 것을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결과와 상관없이 공부에 대한 태도는 발라야 한다. 공부 내용과 방법, 자세 모두 하나님의 원리 안에 하나로 움직이는 것을 상상하곤 했다.     


계절이 바뀌었다. 그 사이 우리 딸은 내 말을 철석같이 믿는 기적을 보였다. 수학에 관련된 건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대신 <빨간 머리 앤>, <하이디>, <폴리애나>, <작은 아씨들>의 세계를 헤엄쳤고 <초원의 집>을 매일 상상했다. 이전에도 책을 좋아했지만, 수학 없는 세상 덕분인지 더 마음껏 책을 향유했다. 가끔은 ‘홈스쿨 한다더니 애 공부 습관 하나 못 잡는 엄마, 무책임한 엄마.’와 같은 부정적인 내면의 속삭임이 힘들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더 중요한 걸 배웠어.’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정말 그랬다. 무엇보다 아이 안에 엄마로부터 오는 신뢰가 깊어졌다. 우리는 서로 더 아끼고 사랑하며 성장했다.     


“엄마, 나 다시 수학 공부하고 싶어요.” 서너 달 지났을까. 아이는 생각보다 빨리 수학 공부에 대한 열의를 보였다. 자기에게 맞는 공부 방법과 공부할 양을 정했다. 조금씩 꾸준히 공부하면서 뿌듯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또다시 공부 안 한다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면 뭐 어떤가. 잠시 쉬었다가 다시 시작하면 된다. 이 작은 에피소드는 나를 아이를 기다리고 믿어주는 엄마로 한걸음 성장하게 했다. 아이에겐 자기감정을 돌아보면서 공부의 이유도 되새기는 계기가 됐다. 위기는 기회가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전화위복을 경험한 아이는 매일 수학책을 편다. 마냥 쉽지는 않지만 아이는 기꺼이 오늘도 수학 공부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이언트 얀 가방을 만들며 '과정'을 생각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