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미술관, 가나아트컬렉션실,《80 도시현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활동하는 도슨트들은 모두 자원봉사자입니다. 때때로 사설 프로그램을 끼고 해설하러 오시는 도슨트 분들도 계시지만,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도슨트를 들으시는 분들이 만난 도슨트들은 모두 자원봉사자 도슨트죠. 저 또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자원봉사자 도슨트로도 활동하고 있는데요, 전 이곳에서 전시해설을 하는 시간을 너무나 기다립니다. 특히 이곳 그 어떤 전시보다 상설전인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와 가나아트컬렉션인《80 도시현실》해설을 좋아해요.(글을 쓰는 이 시점은 전시가 새로 바뀌었습니다만) 아니, 사랑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평일 해설이라면 더욱 애정합니다 그 이유는요.
이 전시, 특히 평일 관람객분들의 특성 때문입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주말 관람객이 너무 많아요. 평일에는 상대적으로 소수(소수여도 스무 분은 늘 훌쩍 넘으시긴 하지만)의 관람객 분들이 오셔서 좀 더 넓은 공간에서 함께 작품을 바라 볼 수 있어요. 또 보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기에 가볍게 그 작품에 대한 소회를 관람객분들이 직접 말씀하실 시간이 있답니다.(저는 관람객분들과 감정이든 말이든 주고받는것을 참 좋아합니다.) 그리고 이때는요, 20-40대의 젊으신 분들보다 60-70대 분들이 많습니다. 모든 관람객을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젊은 관람객분들 보다 중년이상이신 분들이 감상에 대한 표정과 표현이 솔직하십니다. 제 경험에만 비추어 보자면 대부분 그렇더라고요. 젊은 관람객 분들은 집중도가 높으시지만 도슨트가 나이가 더 많다 보니(제 경우에요, 서울시립미술관에는 20대의 자원봉사 도슨트 분들도 많습니다) 예의를 갖춰 경청해주세요. 그러다보니 어쩔 수 없이 분위기가 다소 딱딱합니다. 하지만 중장년 이상의 관람객 분들은 일단 저를 귀여워(?) 해주십니다. 오구오구 바라보신달까요? 그리고 세상을 오래 겪으신 분들이라 이 정도의 반응과 솔직한 리액션, 자유로운 감상이 삶을 풍요롭게 해줌을 아십니다. 지혜가 쌓이신 거죠. 그래서 추임새를 참 잘 넣어주십니다. 저 또한 제 어머니의 연배를 모시는 시간이기에 마음에서 뭔지 모르게 더 잘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크고요. (앗 오해 마세요. 젊은 분들이 오셔도 언제나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 제 어머니 연배의 관람객 분들이 유독 다수인 평일 전시에서는 《80 도시현실》전시 해설 시간이 유독 재미있습니다. 그 전시에는요, 1980년대라는 시절의 도시 즉 서울을 바라보던 예술가들의 심상을 담은 작품 21점이 모여있습니다. 1980년대라는 3저 호황의 풍요의 시대, 하지만 그 내면 깊숙히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품고 있었던 아이러니의 시대를 예민하고 기민하게 포착한 다양한 작품 속에서 아마 중년이상의 관람객 분들은 이미 역사가 된 살아온 세월을 다시금 떠올리게 됩니다. 40년 전입니다. 그분들이 20대-30대의 청춘이었던 시기지요. 그렇기에 그 떠올린 기억이 이 작품들을 저마다의 감상으로 재해석 하고 계실 겁니다. 그러니 그 시절을 경험하지 못한, 책으로만 본 젊은이들보다 훨씬 깊숙히 작품에 동화되실 수 밖에 없겠지요. 도슨트 진행 중 관람객 분들의 표정이 가장 다양해 지는 작품은 아마 단연코 전민조 작가의 사진 4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래 문단부터 이 글에서 다루는 "관람객"이란 표현은 60-70대 관람객 분들로 한정함을 미리 알립니다.
전민조 작가는 원래 한국일보의 사진기자였습니다. 당연히 사진을 통해 사회의 일면을 전달하는 것에 익숙했겠죠. 위 사진은 을지로2가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지금은 없는 직업 버스양의 힘겨운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또 이 버스양을 통해서 그만큼 바쁘고 힘겹게 돌아가고 있었던 도시의 일면을 대표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 작품을 볼 때 관람객분들의 표정은 어떨까요? '미소'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제가 이 작품을 해설할 때 "오라이~"라는 표현을 쓰기에 재미있어 그럴 수도 있지만 그 미소에서는 뭔가 '반가움'이 묻어 납니다. 옛날 가족 사진첩을 열어볼 때의 그런 반가움 그런 비슷한 감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 관람객 분은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해주시더라고요.
"선생님, 그냥 오라이~가 아니에요. 오라이~ 하면서 버스 벽을 탕탕 두 번 쳐야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이후 부터는 "이 버스양 기억하시나요? 저는 실제로 겪어본적이 없지만 예전 관람객 분께서 저에게 가르쳐주셨는데 버스 벽을 탕탕 두 번 치며 오라이~ 했다고 말씀해주시더라고요."라고 해설을 바꿨답니다.
하지만 이내 미간을 찌푸리시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십니다. 이어지는 제 도슨트가 또 추억 속 일면을 건드렸나봅니다.
"이 버스양을 통해 바쁘게 돌아가던 그 시대의 서울을 보여주기도 하지만요. 한 편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희 엄마의 말에 따르면 이때 버스양들이 대부분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의 어린 여성들이었다고 해요. 그런데 이 시간 등교하는 또래의 교복입은 학생들을 바라보며 이 소녀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그런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맞아, 그랬어." "그래 내가 아는 언니가 저 일을 했었는데 그랬다 하더라고." "그때 계산이 좀 부족하다 싶으면 도둑으로 몰기도 하고 참 억울한 일도 많았나봐." 관람객들의 작은 웅얼거림들이 들려옵니다.
이 작품에도 관람객 분들의 많은 추억이 묻어납니다. 그리고 이 작품 해설도 한 관람객 분의 추억담으로 해설 내용이 다소 바뀐 작품이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이 작품에서 작품 중앙의 걸인에 집중해 구걸하는 걸인을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바쁘게 지나치는 대중들에서 전통적 정 많은 사회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팍팍함, 냉소적인 사람들을 작가가 느끼지 않았을까라고 해설했는데요. 한 남성 관람객분은 이 작품을 유심히 살펴 보시다 이런 말씀을 남기시더라고요.
"와, 사진 안에 동서증권. 보여? 여보? 저기 내가 다녔던 곳이잖아. 세상에. 저게 사진에 남아있네. IMF때 망해버린 다음에 저 간판 처음 보는 것 같아."
그 말씀을 전해 들었을 때 머리를 한 대 얻어 맞은 것 같았어요. 전민조 작가는 "사람과 도시는 항상 변화한다."라는 작가론을 이야기 한 바 있는데요, 정말 그 말을 전하는 예화구나 싶더라고요. 그때 부터는 다음의 이야기를 관람객 분들께 전했습니다.
"이곳은 명동의 중앙로 입니다. 거리 중앙에 걸인이 구걸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주변 사람들은 저 걸인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바삐 제 갈길을 걸어갑니다. 주변을 보지 못하는 냉소적인 도시인을 이야기하는 듯 합니다. 그리고 우리 이 사진 속 빌딩들에 걸려 있는 간판들 자세히 봐 볼까요? 대한투자신탁, 동서증권 등 지금은 볼 수 없는 금융회사들의 간판이 보입니다. 지금 이 거리는 쇼핑과 외식의 거리이지만 이 시절 명동은 지금의 여의도와 같은 금융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전에 한 관람객분이 이곳들을 가르키며 모두 IMF때 문을 닫았던 회사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전민조 작가는 '도시와 사람은 항상 변화한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 사진을 찍은 시점의 전민조 작가가 느꼈던 심상과 아마 1997년 IMF 금융위기를 겪은 누군가가 느끼는 심상은 다를 수 밖에 없을 겁니다. 또 먼 훗날 지금의 청년들은 이 사진에서 또 다른 무언가를 읽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요? "
"이 작품은 <잠자는 도시의 정오 사이렌>, 1985년 이흥덕 작가의 작품입니다. 도시가 마치 얼어붙은 듯 푸른색, 보라색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저 멀리서 검은 연기가 피워 오르며 불안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데요, 당인리 화력발전소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앞쪽은 아마 남산 정도가 되겠네요. 제목에서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민방공 훈련을 할 때의 도시 분위기를 그렸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사이렌이 울리면 책상아래로 들어가는 훈련을 했던 기억이 있는데요, 아마 이 시절에는 좀 더 엄격하게 이 훈련이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부모님 이야기를 들어보니 1980년대에 민방공 훈련을 하면 길을 가다가도 안내에 따라 지하로 몸을 숨겨야했고, 자동차들은 모두 갓길에 세웠다고 하더라고요. 사이렌 소리가 멎어야 다시 가던 길을 가고 도시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합니다. 그 일 순간 정지하며 얼음처럼 얼어붙었던 도시의 그 분위기를 이흥덕 작가는 이 화폭에 담았습니다. 화면 오른쪽 하단을 보시면 유일하게 붉은 색이 보입니다. 한 여성이 검은 개에게 쫓기고 있죠. 검은개는 도상학적으로 불안, 두려움, 공포 등을 나타냅니다. 영국의 수상 윈스턴처칠도 자신의 우울증을 '검은 개'라고 표현하기도 했잖아요. 이 시간 동안 도시인들이 알게 모르게 느껴야 했던 불안감과 두려움을 이 검은 개에게 쫓기는 여성으로 대치해 표현했습니다. "
해설을 마치면 작은 대화 소리가 들려옵니다. "나도 저 훈련 할 때면 아, 맞다 우리 휴전 중이지? 하는 생각이 다시 엄습하고는 했어" "난 지금도 그래" "전쟁을 직접 겪은 우리 부모 세대는 저 때 더 무서워했어. 우리 엄마는 진짜 전쟁이나 난 것 처럼 방안에 꼭 틀어 잠그고 들어가고 그랬었어." 등등의 이야기들. 아마 해설을 위해 아무리 제가 이것 저것 공부를 많이 해 보았다지만 그 심리와 정서를 겪으신 분들만큼 알 순 없을 겁니다. 어찌 감히 다 알 수 있을까요? 몇몇 분들은 마치 그 시절로 소환된 듯 굳은 표정이 되시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이 글을 쓰려는 지금도 웃음이 튀어나옵니다. 우리 어머님들이 보자마자 너무나 반가워 하시면서 만면의 웃음이 끊이지 않는 작품이에요. 그림 속에 등장하는 딱 하나의 존재 때문입니다. 바로 "코스모스 백화점"이죠. 해설 시작 전에 이미 들려 옵니다. "어머! 저거봐! 코스모스 백화점이야." 내가 저기서 무슨 브라우스를 샀는데~ 부터 다양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는 저 코스모스 백화점은 어머님들에게 어떤 '마성의 백화점'입니다. 젊은 시절 너무나 즐기고 때로는 선망했던 공간, 그러나 사라진 공간에 대한 추억은 너무나 진한 모양입니다. 전 처음엔 사실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 정강자 작가라는 가치와 존재감, 얼마나 선구안을 가진 작가였는지에 촛점을 맞춰 이야기 했는데요. 이 코스모스 백화점에 환한 웃음을 짓는 어머님들을 보면서 그 말이 떠오르더라고요. "사람이 평생 잊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결국, 10대와 20대 때 들은 노래라고. 청춘의 기억은 평생을 살게 하는 추억이라고" 어디선가 들었던 말이었지요.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작품의 의미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의 이야기를 꾸려나가고 싶은 욕심이 들었습니다.
"화면 중앙 명동성당이 보입니다. 그리고 우측의 추억속의, 그렇죠. 코스모스 백화점이 보입니다. 정강자 작가의 1973년 작 <명동>입니다. 정강자 작가는 1970년대 우리 나라에서 활동하다가 싱가폴로 이주했습니다. 그리고 2017년에 작고 했죠. 하지만 2023년 아라리오 갤러리에서는 그녀의 대규모 전시를 열었고 2024년 월간미술 1월 호에서는 정강자 작가를 주제로 다양한 조명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2017년 작고한 작가를 오늘날 까지 이렇게 예술계에서 깊이있게 다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시대를 앞서 갔던' 작가였음을 보여줍니다. 정강자 작가는 1968년 당시 우리나라 분위기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퍼포먼스를 펼칩니다. 바로 <투명 풍선과 누드>였습니다.
1968년 5월 30일, 정강자 작가는 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 <투명 풍선과 누드>라는 제목의 해프닝을 1시간 동안 진행했습니다. 동료작가들이 당시 25세였던 정 화백의 알몸에 투명풍선을 달고, 풍선을 터뜨린 뒤 정 화백이 퇴장하는 순서로 진행했다고 합니다. 230석의 실내에 약 300여 명이 관람한 이 작품은 당시 미술계와 사회 전반에 걸친 부조리에서 벗어나 여성해방을 추구한 행위예술이었죠. 하지만 이 시대가 어떤 시절입니까. 아마 이런 장면을 기억하시는 분들도 계실텐데요.
여성들의 치마 길이도 나라가 단속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퍼포먼스를 예술로써 봐 주는 사회적 분위기는 당연히 아니었겠죠. 화백이 운영했던 미술학원은 안좋은 소문이 나면서 문을 닫게 되고 그해 경향신문이 선정한 '발광상' 1위로 뽑혔다고 합니다. 2위는 미니스커트를 입은 윤복희였다고 하죠. 그 후 문화예술계의 요주의 인물이 된 정강자 작가는 1970년 첫 개인전을 열지만 오픈도 하기 전 당국에 의해 철거 되고 말죠. 이 그림은 그런 사건이 있은 후 1973년 발표된 작품입니다. 상의를 탈의한 여성이 화구통을 어깨에 들고 당당히 명동 거리를 걸어갑니다. 당시 명동은 예술인들이 자주 모이던 상징적인 장소였습니다. 여전히 나는 건재하고 있으며 여성 예술가로써 나의 길을 당당히 걸어갈 것이다라는 의지가 느껴집니다."
어머님 관람객 분들의 만면에는 웃음이 가득합니다. 과거의 기억은 추억이란 이름으로 포장돼, 그저 웃음이 나는 일이 되기도 하니까요 그 시절 속 추억에 잠기기도 하지만, 아마도 지금의 우리보다 여성으로서 삶이 더 팍팍하고 어려웠던 시절을 견뎌 오신 분들이라 이런 신체적 정신적 억압 속의 여성 중 한 명이 이렇게 목소리를 낸 적이 있었구나...... 싶은 먹먹함에 빠지기도 하십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돌고 돌아서 다시 코스모스 백화점으로 도돌이표 되기도 합니다.
《80 도시현실》해설을 마치고 나면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전시로 해설이 이어집니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관의 오랜 인기 전시입니다. 천경자 화백이 주는 강력한 이야기, 메시지, 드라미틱한 삶이 펼쳐지거든요. 그곳에서도 여전히 관람객 분들은 귀를 기울이십니다. 천경자 작가는 화가이기도 하지만, 우리 나라에선 당시 흔치 않은 예술가이자 인플루언서, 셀럽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젊은 시절을 함께 지내온 작가의 이야기는 매력적일 수 밖에요. 가끔 전시 도슨트를 마치고 나면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사실 <천경자전> 때문에 왔는데 <80 도시현실>이 너무 재미있었어요."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랑 왔는데 추억 속에 빠져서 너무 즐거웠습니다."
"젋었던 시절이 계속 나오니까 그때 마음이 안에서 자꾸 올라와서 젊어진 기분까지 들어요."
앞서 이야기한 전민조 작가의 말처럼 사람과 도시는 변합니다. 어린 시절 읽었던 소설이 지금 읽어보면 그때 읽은 내용이 아니듯, 사회 문제의 고발, 외로움과 고독, 두려움의 이야기를 그린 그림에 시간이 켜켜이 쌓여 세월이 더해지니 누군가에겐 추억이 되기도 합니다. 그림은 때론 작가의 의도, 미술사적 의의와 다르게 읽히고 회자되고 추억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또 아무렴 어떻습니까. 전 제 도슨트를 듣고 흩어지셨던 관람객 분들이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관의 카메 SeMA에 앉으셔서 그림이야기, 추억 이야기, 젊은 시절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 보내셨으면 그것만으로도 참 좋습니다.
《80 도시현실》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에서 발췌했습니다.
《80 도시현실》은 1980년대 도시를 둘러싼 한국의 현실을 서울시립미술관 가나아트 컬렉션과 소장품을 통해 다각도로 살펴보는 전시입니다. 가나아트 컬렉션은 2001년 가나아트 이호재 대표가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한 200점의 작품군으로 1980-90년대 한국의 사회현실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민중미술 및 리얼리즘 계열의 작품들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 한국 사회는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1960-70년대 고도 경제 성장을 기반으로 도시화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시기였습니다. 한국은 급격한 산업화와 경제적 성장을 이뤄냈지만, 빛나는 성장의 이면에는 여러 사회적 문제들이 존재했습니다. 근로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에 처하고, 농촌 경제는 쇠락하며 이촌향도 현상은 심화되었습니다. 또한 강남개발, 중산층의 등장, 수입자유화 등으로 인해 도시를 중심으로 소비문화의 발달이 가속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당대의 예술가들은 자신만의 시각과 방식으로 다양한 작품을 제작하였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1980년대 도시 현실의 여러 양상을 ‘도시화의 이면’, ‘도시인’, ‘도시를 넘어 - 생명의 근원’의 세 개의 소주제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번 전시를 통하여 1980년대 도시를 둘러싼 다양한 사회적, 개인적 차원의 현실을 당대를 살아갔던 예술가의 눈을 빌려 읽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당시의 문제의식과 고민이 40년이 지난 현재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숙고할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