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서무의 괴로움을 함께 해주신 고마운 분
2012년 처음 그를 만났다.
웃음기와 나긋함이라곤 찾기 어려웠던 처음 그를 만난 날, 어디에서 일하냐는 질문에 요 앞 은행이요,라고 대답하고 구두를 닦는 그의 손을 내려보았다. 작은 체구에 투박한 손이었다. 어색한 두어 마디의 얘기를 빨리 끝내고 싶어 계산을 하고 지점장 구두 한 켤레를 들고 나왔다. 서무의 고단함을 이제와 생각해 보니, 폐쇄적인 조직의 관행과 의전과 연관된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일과 중 하나가 지점장의 두어 켤레의 구두를 주기적으로 닦아놓고 대금의 결제를 담당하는 것이었는데, 수년간 이분과 쌓아간 대화와 한숨과 한탄이 다양한 지층구조로 켜켜이 쌓였다. 때론 기쁨과 아쉬움과 답답함, 그리고 다른 곳으로 발령받으면서의 헤어지는 서운함.
대게 이 동네 자체가 그랬다. 타지에서 온 이들에 대해 배타적이었고, 지점에 발령받아 온 직원들 또한 70%가량이 이 동네 출신 혹은 인근 거주 직원들이었다. 뭐, 은행의 발령이 그런 구조이기도 했었고.
암튼, 12년이 흐른 지금도 난 그와의 인연을 이어가는 중이다. 인연이라 표현하려니 어색함도 있지만, 나의 진급과 이동 그리고 결혼과 출산 등 모든 과정의 얘기를 공유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타 지역으로 발령을 받았으나 난 늘 주말을 이용해 아저씨에게 구두를 닦으러 갔다. 서너 켤레를 두 손에 가득 든 것으로도 모자라 늘 박카스 한 박스도 함께였다. 이유 없이 나누고 싶던 나의 근황 그보다 아저씨를 향해 갖고 있던 고마움과 그리움의 소심한 표현이었다. 얼마 전엔 아들과 청계산을 가던 중 마주친 아저씨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주말 아침 목욕탕에 다녀오시는 아저씨는 여기 목욕탕의 세신사가 최고라며 꼭 가보라는 당부의 말과 함께, 둘째 아들이 큰 것을 보고 엄지 손가락을 추켜세웠다. 세월의 고단함을 단단한 개인적 성향으로 압도해버리고 있는 아저씨는 12년 전 그대로였다.
이런 인연이 몇몇 있다.
근처에서 정육점을 하시는 부부, 떡집 아주머니, 생삼겹살 집 사장님, 이제는 문을 닫았지만 숯불양념치킨집 사장님 부부. 오며 가며 시답잖은 얘기들을 반갑게 들어주시고 응원해 주셨던 분들이다. 잊고 살지만 잊히지 않는다. 문득 떠오르는 그분들의 건강과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 그래도 은행원이 최고라며 기를 살려주시던 그분들의 이야기가 떠오를 때 새삼 그 안락함을 벗어나 세상밖으로 나오겠다는 결심을 했던 8년 전이 떠오른다. 바삭하고 두툼한 치킨 옷을 입은 후라이드 한 마리와 양배추 샐러드를 내오시던 사장님은 그러지 말라했다. 어떻게든 버텨보라고, 나와서 좋을게 뭐가 있냐고 했다. 그렇다고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나가면 좀 더 나았을까? 혹은 그냥 버텼다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해 예단하기 어려우니 그 판단은 유보하는 것이 맞겠다. 다만 나와서 좋은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나 스스로 하는 선택에 대한 책임, 그 대가와 두려움, 그러나 주체적으로 살아가며 하루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주위의 선입견과 편향된 의견에 나의 결정을 맡기지 않을 정도의 강한 내공이 생겼다는 것, 언제든 변화하는 환경과 상황에 유연하고 의연하게 대처하며 냉정하고 빠른 상황판단이 가능해졌다. 은행을 퇴사하고 얻은 것은 이것이었다.
그 이후의 삶은 되려 이전보다 치열했다. 하지만 살아남았고 온전히 나의 힘으로 다시 시작했다. 삶이 나를 연타하기도 했으나 두둑한 맷집으로 다시 주먹 쥐고 일어섰다. 완벽한 삶은 아니었으나 떳떳한 삶이었고 숨 가쁘게 달려온 시간들이었다.
이렇게 눈부신 주말의 가을 아침이 되면 오래전 구둣방아저씨를 처음 만났던 그때가 떠오른다.
앞으로도 꽤 오랜 시간, 나의 기억을 추억을 그리고 삶의 일부를 알아주셨던 아저씨가 건강하게 계셨으면 좋겠다. 그래서 어느 날 문득, 먼지 쌓인 그날의 이야기들을 꺼내고 싶을 때 12년 전의 그날처럼 투박하게 나를 맞아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