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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Feb 29. 2024

저물지 않는 시간의 사랑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이금이, 사계절, 2016)

 작품 뒷 표지의 글로 줄거리 소개를 대신한다.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이 말 한마디로 당시 누구도 꿈꾸지 못했을 인생을 살아 낸 사람이 있다. 작은 시골 마을의 일곱 살 소녀 수남은 논 서 마지기에 자작의 딸 생일 선물로 팔려 경성으로 온다. 그리고 국경을 넘고 대륙을 횡단해 바다 건너 지구 반대편 땅에 다다랐다 돌아오는 인생 여행을 한다. 여덟 살 생일 선물로 수남을 갖게 된 자작의 딸 채령은 남 부러울 것 없이 살다 험난한 인생 역정을 겪는다. 두 주인공은 신분과 성별, 배움과 문화, 민족과 인종 등 파도처럼 덮쳐 오는 온갖 장애를 뛰어넘으며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정국의 혼란기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매혹적인 성장담과 드넓은 공간을 아우르는 여정은 그 시절 사람들의 삶과 이어져 우리를 역사 속으로 이끈다. 한 땀 한 땀 이들이 수놓는 기억과 시간의 조각보는 뒤바뀐 진실 앞에 어떤 모습으로 완성될까?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때, 멈추지 않고 끝까지 손에 놓지 않을 수 있던 이유는 "저물지 않는 시간의 사랑" 때문이었다. 나는 어느 순간 사랑 이야기에 빠져있다. 동시를 읽을 때도, 동화를 읽을 때도, 소설을 읽을 때도, 성인문학을 읽을 때도 요즘에는 사랑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다. 더구나 이 작품에서는 사랑의 다양한 질감을 느낄수 있다.

 작품 속 사랑을 나열하자면, 수남과 강휘, 수남과 태술, 수남과 첸, 채령과 정규, 채령과 준페이의 사랑이 있다. 그 밖에도 자녀에 대한 형만, 술이네, 곽씨네의 사랑 등 무수히 많은 사랑의 입자를 확인할 수 있다. (사랑의 입자는 문학동네 청소년 테마 소설 시리즈의 한 제목이다.)

 서사의 중심이 되는 건 수남의 강휘에 대한 사랑이다. 수남이 보여주는 사랑은 서사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라고도 생각된다. 수남은 강휘에게 첫눈에 반한다. 한국에서 일본, 일본에서 중국, 중국에서 미국, 미국에서 다시 중국으로 수남은 수 많은 난관을 헤쳐나간다. 수남이 긴 여정을 통과할 수 있었던 건, 강휘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 속 품고 있던 강휘에 대한 사랑이 수남을 계속 나아가게 했다. 역시 사랑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수남과 강휘의 사랑은 비극적 결말을 맺는다. 중국에서 재회한 수남과 강휘는 결혼을 약속했고, 서울로 돌아와 함께 살기로 했다. 서울로 돌아올 준비를 하던 수남은 일본 군인에게 겁탈 당했다. 강휘와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가회동 집으로 돌아왔다. 강휘는 남아 있던 일본군 총에 맞아 죽었다. 수남은 아들을 출산하였으나, 강휘의 아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 그 아이가 강휘와 자신의 아이임을 알게 되었다. 수남은 "아들 덕분에 영원히 강휘의 아내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강휘에 대한 영원한 사랑을 보여준다. 수남의 사랑은 지고지순하다.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존재한다. 수남의 사랑 또한 분명 인정받을 만하다. 다만, 일제 강점기, 해방 정국에 온갖 차별과 멸시와 맞서 살아 온 수남이 "영원한 강휘의 아내"를 선택하는 건 조금 아쉽다. 주체적 선택이 아닌, 운명에 대한 순응 같다. 강휘의 아내를 선택하는 건, 지위와 권력에 대한 욕망을 의미하는 것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수남의 생을 생각해보면, 강휘에 대한 사랑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수남의 살아온 역사를 생각해보았을 때, 마지막 선택이 아쉽다는 의미이다. 사실 많은 사람이 수남과 같은 사랑, 마지막 순간까지 잊지 못하는 영원한 사랑을 꿈꾼다. 수남과 반대의 사랑은 채령과 준페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채령은 젊은 시절 불사지르는 사랑을 한다. 준페이는 사랑으로 시작했지만 소유와 집착이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강휘에 대한 수남의 사랑은 서사의 중심이다. 수남에 대한 강휘의 사랑은 어떨까. 자신이 첩의 자식이며, 어머니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강휘는 일본으로 유학한다. 아버지에 대한 양가 감정으로 방황하던 강휘는 중국으로 도망간다. 독립군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독립에 대한 열망은 없었다. 강휘가 독립군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수남이다. 수남에 대한 사랑을 확인한 뒤였다. 지키고 싶은 사람이 생겨서 독립군에 들어왔다고 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독립된 조국을 선물하고 싶다고 하였다.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태도라고 생각한다. 나라를 위해서, 조국을 위해서, 대의 명분을 위해서 싸우는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동기를 갖기는 쉽지 않다. 피부에 와 닿지 않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국가를 위한 개인의 희생은 2차 대전 이후 끝났다. 더 이상 강요할 수 없다. 우리가 싸워야 하는 이유는 나의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다. 우리는 사랑하는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행동하고 맞서 싸운다. 강휘를 통해 알 수 있다.

 수남의 고백은 소설의 마침표다. 자작의 딸로 사는 삶을 내려 놓고 싶지 않았다는 용기 있는 고백이 소설의 완성이다. 서사의 중심이 수남의 사랑이라면, 소설의 완성은 곧 수남의 사랑의 완결이다. 수남의 고백은 사랑의 온점이다. 진실에 대한 냉철한 대면과 용기 있는 고백이 수남의 사랑을 지켰다. 물론, 강휘를 위해 수남이 부끄러운 진실을 드러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실에 대한 고백이 없었다면, 수남의 사랑은 왜곡된 채로 남아있을 지도 모른다. 고백은 사랑을 할 때만 아니라, 삶을 올바르게 마무리할 때도 필요한 것이다. 이 소설이 가르쳐 준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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