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늘 Mar 31. 2024

지리산골이 보여주는 미덕

남호섭의 동시 <지리산골 품안목욕탕>(『동시마중』83호)

지리산골 품안목욕탕


                              남호섭


지리산 산내에 가면 목욕탕이 있는데요

지리산 품안에 안겨 있다 보니까

아주 자그마해서 남자랑 여자가 같이 써야 하지요

아니 아니, 같이 들어가는 거는 아니고(절대 그러면 안 되지요)

남자 목욕하는 날 따로, 여자 목욕하는 날 따로

그래서 월수금은 여탕, 화목은 남탕이지요


마한시대 궁궐 있던 달궁마을 반달곰네도

구름도 누워 가는 와운마을 고라니네도

지리산 둘레길 처음 시작된 매동마을 고양이네도

천왕봉 바라보며 도 닦던 실상사 스님들도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꼭꼭, 확인하고 목욕탕 간다지요



 지리산골 품안목욕탕은 공존의 공간이다. 남자-여자, 동물-인간, 자연-인문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이상적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세계의 작동 법칙은 '선을 지키는 일'이다. 목욕탕은 "아주 자그마해서 남자랑 여자가 같이 써야 하지"만 "같이 들어"갈 수는 없다. 그것은 "절대 그러면 안 되"는 일이다. 남자와 여자가 같이 목욕할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기본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대전제다. "남자 목욕하는 날 따로, 여자 목욕하는 날 따로" 만들어진 것은 사회의 기본 전제를 지키기 위한 행동 규칙이다.

 이러한 규칙이 무너진다면, 목욕탕은 기능을 상실할 수 밖에 없다. 힘이 세고, 권력을 가진 자들의 개인 욕조로 전락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지리산골 품안목욕탕이 모두가 사용하는 공용 목욕탕으로 남을 수 있는 이유는, "반달곰네도", "고라니네도", "고양이네도", "스님들도" 모두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꼭꼭, 확인하고 목욕탕"을 가기 때문이다. 

 이 목욕탕의 규칙을 살펴보면, "월수금은 여탕, 화목은 남탕"이다. 평일에만 운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해지고, 여자가 남자보다 하루 더 사용하는 이유도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우선, 목욕탕이 주말에는 쉬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그만 목욕탕에도 휴식의 시간을 주는 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공터가 있으면 상가나 아파트를 올려버리고, 산을 있는대로 밀어버리려고 하는 지금의 세태와 대조적이다. 자연도 휴식의 시간이 필요하다. 방해 받지 않는 쉼의 시간이 필요한데, 지금 우리는 그러한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밀어버릴 생각만 가득한 것 같다.

 여탕이 남탕보다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지리산골에는 여자가 더 많거나, 여탕 수요가 더 많기 때문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여탕으로 운영되는 날이 많다는 사실이 혼란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회적 필요에 의한 합의는 결과적으로 불평등으로 보일지 몰라도, 불합리한 운영방식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어떤가. 기계적인 평등, 수치적인 평등을 외치면서 자신의 이득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이 만연하다. 지리산골 품안목욕탕의 양보와 배려의 미덕을 배웠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우리는 분명, 별을 쥔 적이 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