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 이론> (김성은, 동시마중 2024년 9·10월 호)
<원자 이론>의 시적 상황은 단순하다. "흠─" 소리를 내며 숨을 뱉고, 미켈란젤로에서 이중섭을 거쳐 나를 경유한 산소 원자를 상상하는 화자가 있다. 그리고 그 숨을 받아 들이마신 "너─"가 있다. 그런데 "너─"는 누구일까. 두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우선 화자와 마주한 구체적 청자로서 "너"가 있다. 이 경우 "너"를 어떤 대상으로 상상하는지에 따라 시의 내용이 달라질 것이다.
예컨대 화자가 좋아하는 어떤 아이를 "너"로 상정한다면, <원자 이론>은 일종의 사랑 고백으로 생각되는데, 마치 나의 숨 일부를 너에게 넘겨주는 것처럼 읽힌다. 지금까지 알던 낭만과는 거리가 멀지만 과학과 역사를 좋아하는 어린이의 현실적인 고백법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건 그 어린이의 고유한 낭만일 수 있을 것이다.
화자와 청자는 친구, 형제, 자매, 남매 등 다양하게 설정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수많은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청자에서 벗어난다면 "너─"는 독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 때 독자는 화자의 숨을 직접 이어 받게 된다.
독자가 건네 받은 그 숨은 르네상스 거장 미켈란젤로의 것이며, 무성 영화 시기 코미디 대가 채플린의 것이기도 하다. 가깝게는 화자의 할머니로부터 온 것이다. 날숨과 들숨 사이 전달되는 원자에 실로 엄청난 시간의 두께가 감지된다.
다만 원자가 지나온 경로에 인간만 호명되는 점은 조금 아쉽기도 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원자가 인간 세계 안에 갇혀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인의 상상력이 인간 세계를 뚫고 우주로 나아가지 못 했을리 없다. 시인은 이미 "먼 지구 밖에서/ 날아와/ 구름을 뚫고/ 산을 넘어/ 와- 와- / 환호성과 함께"(<시간이 미래에서 오고 있다면>) 달려오는 미래를 구체적으로 감각할 수 있게 해준 바 있다. 인간 아닌 존재를 배제한 분명한 의도가 있을 것이지만, 나로서는 그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보여지는 세계가 확장되기를 바라는 이유는 비어있는 공간을 채우는 일이 이 시를 읽는 방법이자 재미 요소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시는 화자-청자의 관계가 분명하지 않으므로 독자는 다양한 맥락을 스스로 상상하며 의미를 새롭게 생성한다. 또한 모든 인물이 “몸속에 들어갔다 나온 산소원자를/ 들이마신”으로 연결되는 연쇄의 형식은 시간의 연속성과 닮아있지만 그들을 관계 짓는 맥락은 쉽게 찾기 어렵다. 특히 여섯 명의 이름(고유 명사)에서 할머니, 나(보통 명사)로 이어지는 부분을 연결하는 적절한 고리는 제시되어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결국 시의 맥락은 독자가 결정한다. 시에 내재된 세계의 확장 가능성이 시인이 아니라 독자에게 있으므로 인간 세계로 한정된 울타리가 무너진다면 더 넓은 상상이 가능하지 않을까.
김성은의 <시간이 미래에서 오고 있다면>이 "먼 지구 밖에서/ 날아와/ 구름을 뚫고/ 산을 넘어/ 와- 와- / 환호성과 함께" 오는 미래-지금의 시간을 그리고 있다면, <원자 이론>은 과거-지금의 시간을 보여준다. 한 쪽은 먼 미래에서 지금으로 달려오는 시간을, 다른 한 쪽은 먼 과거에서 지금으로 이어지는 시간을 시각화한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지금'을 축으로 하는 데칼코마니 같은 상호텍스트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듯 시인은 지나온 시간, 다가올(것이라 생각되는) 시간과 '지금'의 관계에 주목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이유일까.
과거로부터 쌓여온 시간의 두께를 경험함으로써 독자의 지금은 감각적으로 풍부해질 뿐 아니라, 세상과 연결감이 선명해진다. 전달받은 원자는 나를 거쳐 누군가에게 전달될 것이므로 나는 단절된 존재일 수 없다. 연결되어있다는 느낌은 누군가에겐 위로가 되고, 누군가에겐 안정감을 주며, 누군가에겐 아늑함이 되어줄 것이다. 시인이 보여주는 지금의 의미는 작품마다 다르지만, 시간을 탐구하는 바탕에는 현재 삶을 긍정하고, 응원하는 마음이 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