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저자원 국가의 테크는 느리지 않다

인프라 없는 대륙의 인프라 전쟁

by 이은빈

기술이란 언제나 빠르고 혁신적인 모습으로 이야기된다. 실리콘밸리에서는 몇 개월 만에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고, 세계 어디서든 쓸 수 있는 플랫폼이 등장한다. 하지만 전 세계가 그 속도로 움직이진 않는다. 특히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등 이른바 "저자원 국가"에서는 기술의 모습이 조금 다르다.


이 책은 그런 차이를 단순히 "뒤처짐"이나 "낙후"로 보는 대신, 다른 작동 원리에서 출발한 진화로 이해하려는 시도다. 실제로는, 우리가 익숙한 구조와는 전혀 다른 논리와 조건에서 기술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중요한 통찰들이 숨어 있다.



왜 '느려 보이는'가?


한때 이런 나라들을 설명하는 말이 있었다. "다음 사용자 10억 명(next billion users)". 큰 시장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지만 곧 성장할 거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 프레임은 지금은 맞지 않는다. 단순히 인터넷이 부족하고, 계좌가 없고, 투자금이 적다는 이유로 그 나라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는 건 정확하지 않다.


Screenshot 2025-06-02 at 3.57.58 PM.png


실제로는, 그 '부족함'이 기술을 오히려 다르게 만들고 있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은 있지만 신분증이 없는 나라에서는 어떻게 본인 인증을 할까? 은행이 없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돈을 보내고 받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다 보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설계된 기술 생태계가 보인다.


기준이 다른 곳에서는, 평가 기준도 달라야 한다


우리는 보통 기술 발전을 이야기할 때 몇 가지 지표를 본다. 얼마나 많은 투자금이 들어왔는가, 유니콘 기업이 몇 개인가, 인터넷 보급률은 얼마나 되는가. 하지만 이런 기준들은 미국이나 한국처럼 이미 시스템이 갖춰진 나라에서나 통하는 얘기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에서는 신용점수라는 개념이 희박하다. KYC(고객신원확인)도 제대로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은행 계좌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 이런 조건에서는 우리가 익숙한 기준이 오히려 현실을 가리는 장벽이 된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는 기술이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설계된다:


신분증보다 휴대전화 사용 패턴이 더 중요하다

계좌보다 SIM 카드가 금융의 시작점이다

앱보다 데이터를 연결해 주는 인터페이스가 핵심이다


이건 단순히 느린 게 아니다. 완전히 다른 출발점에서 출발한 기술 구조인 것이다.


1.jpeg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술의 재설계

이제 실제 사례를 통해 저자원 국가들에서 기술이 어떻게 설계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특히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보지만, 동남아시아나 남아시아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나타난다. 몇 가지 흥미롭게 본 예시를 살펴본다.


1. Gluwa(실리콘밸리, 나이지리아): 거래부터 시작하는 신뢰


Gluwa는 실리콘밸리에서 시작된 블록체인 기반 핀테크 기업으로, 나이지리아·가나 등 금융 기록이 희박한 지역에서 신뢰를 기록하는 방식 자체를 다시 설계하고 있다.

1500x500


예를 들어, 사용자의 선불폰 충전 빈도, 모바일 머니 송금 패턴, 통신 활동의 일관성 같은 행동 데이터를 수집해—단순 거래 이력이 아니라—반복성과 책임성을 분석한다. 기존처럼 은행의 ‘신용점수’를 참조하는 게 아니라, 사용자의 행동 그 자체를 데이터화해서 신뢰로 환산하는 구조다.


Gluwa가 특히 흥미로운 이유는, 이런 평가 시스템을 온체인 위에 구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개별 기관에 폐쇄된 신용 기록이 아니라, 누구나 검증 가능한 형태로 데이터 신뢰도를 저장하고 공유할 수 있게 만든다. 이는 결국 하나의 사람, 하나의 거래, 하나의 신뢰 단위가 여러 금융 주체 사이를 이동할 수 있게 만드는 새로운 인프라 구조다.


Screenshot 2025-06-02 at 4.07.57 PM.png
Screenshot 2025-06-02 at 4.07.53 PM.png
Gluwa의 현지 나이지리아 청년 AI 교육과 포럼 참석


나는 Gluwa가 단지 금융 접근성을 높이는 회사를 넘어, 신뢰라는 개념을 어떻게 구조화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구조는 이런 방식은 인도네시아의 Amartha, 파키스탄의 Tez Financial 같은 회사들과도 유사하지만, Gluwa는 이를 네트워크 레벨에서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략적으로 다르다.


2. Safaricom(케냐)과 MTN(나이지리아): 통신사가 은행이 된 사례


은행보다 통신사가 먼저 금융이 되는 구조는,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에서 꽤 일관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케냐의 Safaricom이 만든 M-Pesa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 서비스는 휴대폰만 있으면 송금과 결제를 가능하게 했고, 지금은 케냐 GDP의 약 40%가 이 플랫폼을 통해 흐른다.


Screenshot 2025-06-02 at 4.36.18 PM.png


나는 이 사례를 처음 봤을 때 “왜 은행이 아니라 통신사였을까?”라는 질문이 들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통신사만이 전국적 유통망과 사용자 데이터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은행은 지점이 적고, 사용자 신원을 증명할 수단이 부족했지만, Safaricom은 이미 전국에 분산된 리셀러 네트워크와 SIM 등록 데이터를 갖고 있었다.


비슷한 흐름은 나이지리아에서도 반복된다. MTN은 통신사임에도 금융 면허를 획득했고, 자체 유통망을 통해 디지털 월렛과 마이크로 대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기존의 금융 인프라가 아니라 '신뢰 가능한 액세스 포인트'가 인프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구조는 동남아시아에서도 관찰된다. 인도네시아의 Gojek은 호출 앱이었지만 곧 금융 플랫폼으로 전환했고, 필리핀의 GCash는 통신사 계열사로 시작해 현재는 전국적 모바일 금융 플랫폼이 됐다. 모두가 '은행이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도달할 수 있었던 조직이, 결국 금융 인프라의 역할까지 맡게 된 셈이다.



3. MFS Africa: 국가를 넘어선 '인터페이스' 설계


아프리카는 하나의 시장처럼 이야기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나이지리아, 케냐, 코트디부아르, 우간다—국가마다 사용하는 화폐도 다르고, 규제 체계도 다르고, 기술 인프라도 제각각이다. 각국마다 자체 송금 앱이나 통신 기반 결제 시스템이 있지만, 서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국가 간 송금이나 결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예컨대 케냐의 M-Pesa와 나이지리아의 MoMo(MTN Mobile Money)는 각각 수천만 명이 쓰는 플랫폼이지만, 서로 직접 송금은 안 된다.

iVuEZj1ffQXzbyIfPy4kSv7QQNHg52lWlGe9vhLy.jpg


MFS Africa는 이 단절된 구조를 묶는 ‘보이지 않는 인터페이스’를 만든다. 쉽게 말해, 앱을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앱들끼리 서로 대화할 수 있게 해주는 기술을 만드는 회사다. 예를 들어, 케냐의 M-Pesa에서 돈을 보내면 나이지리아의 MoMo 사용자가 그걸 받을 수 있게 해주는 구조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건 단순히 돈을 옮기는 기능이 아니라, 아래 같은 변환 작업들이다:


각 앱의 요청 방식이 달라서 포맷을 통일해줘야 하고

두 나라 간 환율 계산 및 정산을 해야 하며

사용자 인증 체계도 달라서 ID 매칭 및 검증 방식도 바꿔야 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모두 트랜잭션 로그로 기록해야 한다


Visa나 SWIFT처럼 보일 수 있지만, MFS Africa는 이보다 더 복잡한 조건—정형화되지 않은 규제, 신분증 없는 사용자, 비공식 유통망 등—을 다룬다. 동남아에서 PromptPay(태국)나 DANA(인도네시아)가 유사한 실험을 하고 있지만, 아프리카는 훨씬 더 다층적이다.


Screenshot 2025-06-02 at 4.59.26 PM.png 출처: 이은빈


기술적으로 보면, MFS Africa는 각국 결제 시스템과 1:1로 연결된 커넥터(API)를 갖고 있다. 이 커넥터는 각 시스템이 보내는 요청을 공통 포맷으로 번역하고, 필요한 경우 전화번호 형식이나 결제 방식, 통화를 실시간으로 변환한다.


환율 계산과 정산도 내부에서 처리되고, 트랜잭션은 모두 감사 가능한 방식으로 기록된다. 기술적으로 보면, 이건 하나의 ‘API 허브’이자 ‘프로토콜 번역기’다. 사용자 눈에는 단순한 해외 송금처럼 보이지만, 개발자 관점에서 보자면, 각기 다른 생태계가 MFS Africa의 중앙 허브 API를 통해 상호작용하도록 만드는 셈이다. 플랫폼은 드러나지 않지만, 그 위에서 흘러가는 트래픽이 곧 아프리카 디지털 금융의 실제 맥박이다.



4. Fonbnk(미국)와 Kotani Pay(케냐): 행동이 곧 신용이 되는 시스템


아프리카와 같은 저자원 국가에서는 ‘신용점수’라는 개념 자체가 의미를 잃는다. 많은 사람들이 은행 계좌나 공식 금융 이력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데이터가 없는 게 아니라, 우리가 관찰하는 방식이 틀렸다는 데 있다.


Fonbnk와 Kotani Pay는 이 틀을 바꾼다. Fonbnk는 아프리카 사용자들이 신분증 없이도 블록체인 기반 금융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도록 설계된 플랫폼이다. 핵심은 프리페이드 통신 잔액(Airtime*을 디지털 자산처럼 활용해, 이를 기반으로 사용자의 거래 이력과 신뢰도를 분석하는 것. 이 점수는 crypto wallet과 연동되며, 궁극적으로는 블록체인 기반 신원 시스템으로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GsHmROxWMAEYFGF?format=jpg&name=medium 현지원화와 테더 교환 서비스


Kotani Pay는 주로 아프리카의 현금 기반 커뮤니티를 위해 설계된 off-chain ↔ on-chain 인터페이스 플랫폼이다. 사용자들은 USSD (비인터넷 기반 모바일 인터페이스)를 통해 블록체인 기반 송금이나 금융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다. 핵심은 인터넷 없이도 블록체인 사용이 가능하다는 점이며, 이로 인해 은행 계좌나 스마트폰 없이도 온체인 활동이 가능해진다. 이 과정에서도 사용자의 소액 거래 빈도, 송금 패턴, 유통 네트워크 같은 행동 데이터를 수집·분석해 신뢰 점수를 형성하는 구조가 실험되고 있다.


Gr6SoEsWoAE5gGD?format=jpg&name=large


이 두 기업은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경제 활동을 반복하는지를 추적하고, 그 패턴을 기반으로 신뢰를 추정한다. 예컨대, 선불폰 요금을 일정한 간격으로 충전한다든가, 같은 상대에게 소액을 반복적으로 송금한다든가 하는 작은 습관들이 신뢰의 신호로 작동한다.


이런 행동 데이터는 통신사와의 제휴를 통해 수집된다. 사용자별 top-up 기록, 모바일 머니 거래 이력, 데이터 사용량, 위치 기반 패턴 등이 로그 단위로 저장된다. 이후, 얼마나 자주·꾸준히 거래하는지, 거래 상대와의 일관성이 있는지 등 경제 활동의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을 보여주는 특성들이 추출된다.


Screenshot 2025-06-02 at 5.09.24 PM.png 출처: 이은빈


이 특성들은 머신러닝 모델이나 규칙 기반 시스템을 통해 신뢰 점수로 계산된다. 복잡한 신용 모델은 아니다. 하지만 기존 금융 시스템이 부재한 곳에서는, 이것이 실질적인 신뢰의 대안지표가 된다.



누가 이 구조에서 이기는가?

이런 시장에서는 빠르게 앱을 만드는 속도보다, 어떤 ‘레이어’를 선점했는지가 중요하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인프라 구조를 먼저 점유한 기업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생태계 전체를 좌우하게 된다.


예를 들어 미국에선 Plaid가 금융 API 레이어를 점유했다. 덕분에 수많은 앱들이 Plaid의 구조 위에서 작동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선 Gluwa가 신용 데이터의 표준을 설계하고 있고, MFS Africa는 국가 간 결제를 연결하는 인터페이스 계층을 만들고 있다. 이들은 화려한 앱을 만드는 게 아니라, 다른 앱들이 올라탈 수 있는 길을 포장하고 있는 셈이다.


이 기업들의 공통점은 소비자와 직접 접점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 B2B, 또는 B2G 형태로 시장의 밑그림을 그리는 데 집중한다. 앱보다 시스템, 유저 인터페이스보다 생태계 구조가 이들의 작업 대상이다. 그리고 이 구조는 시간이 지날수록 시장 전반의 규칙으로 작동하게 된다.


결론: 지금은 구조를 선점할 수 있는 유일한 시기다

저자원 국가들에서는 기술 인프라가 여전히 미완성 상태다. 그러나 이는 결함이 아니라 기회다. 이미 구조가 자리 잡은 시장에서는 새로운 진입자가 시스템을 설계하기 어렵다. 반면, 아직 규칙이 고정되지 않은 시장에서는 인프라를 먼저 점유하는 기업이 표준을 만든다.


Gluwa, MFS Africa, Fonbnk, Kotani Pay 같은 기업들이 하는 일은 앱 개발이 아니다. 이들은 기술이 작동하는 가장 밑단의 인터페이스와 신뢰 구조를 정의하고 있다. 이들이 어떤 비즈니스 모델을 갖는가는 부차적이다. 중요한 건, 그 위에 올라오는 수많은 서비스들이 이들의 구조 위에서 작동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 시장에서는 B2C 전략보다 생태계 구조에 개입하는 시스템 전략이 더 큰 장기적 지분을 만든다. 이미 만들어진 시장에서는 플랫폼이 승자지만, 아직 형성되지 않은 시장에서는 프로토콜이 승자다.


지금은 그런 프로토콜을 정의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 시기가 끝나면, 이후 진입자들은 그 규칙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




참고 자료

GSMA, "The Mobile Economy: Sub-Saharan Africa 2023"

McKinsey & Co., "Fintech in Africa: The end of the beginning" (2022)

Amartha (Indonesia), company overview

Tez Financial Services (Pakistan), product brief

bKash, EasyPaisa, GCash: platform documentation

Gluwa, MFS Africa, Fonbnk official websites

World Bank Open Data


keyword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