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단한 뇨뇨 Dec 28. 2021

나는 왜 죽음에 대해 글을 쓸까?

문득문득 이제는 볼 수 없는 소중한 사람이 생각날 때가 있다. 

찬바람이 불 때면 가마솥에  시래기며 각종 나물들을 넣어서 보글보글, 연기가 모락모락 나도록 얼큰하게 육개장을 끓여주시던 할머니가 생각난다. 한 숱 깔 떠먹을 때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할머니 생각에 목이 메어오는 추억들이 뜨겁게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다. 

자다가 등이 간지럽다고 등 긁어주세요 하는 큰 아이를 보고 있자면 평생 밭농사로 험하게 변해 버린 할머니의 손 감촉이 기억난다. 서걱서걱.. 할머니의 손을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이 어른거린다. 

사는 게 바빠 돌아가신 걸 잊고 있다가도 불현듯 그렇게 눈물이 난다. 


며칠 전 새벽 기상 모임을 하면서 한 회원분이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다.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 보니 나는 어릴 때부터 유독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아이였다. 

내가 자살을 생각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간경화를 앓고 계신 할아버지를 어릴 때부터 간호했고, 집에서 임종을 맞고 장례를 치른 기억, 시골에서 자라면서 이웃 어른들이 한 분씩 돌아가시는 것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자연스럽게 사람이 태어나 어떻게 살고 마지막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고등학교 때  심리 검사를 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도 나는 진짜 죽음에 대해 진진하게 고민하고 성찰하는 아이였다. 

" 죽음을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네"라는 답을 적었다가 상담실에 불려 가기도 했다. 

나는 누구보다 삶을 열심히 살았다. 단지 다른 아이들에 비해 내성적이었고, 책을 좋아해서 활발하게 어울리는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내 삶을 잘 살고자 하는 욕심만은 큰 아이다. 선생님께 이런 나를 한참이나 설명하고 나서야 상담실을 탈출할 수 있었다. 


더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보면 학교 때문에 부모님과 떨어져 살면서 향수병이 생겼다. 아무도 없는 방에 혼자 있으면서 우울한 날이 많았다. 철없이 연애할 땐 '스스로 행복한 삶'에 대해 알지 못했기에 20대를 울면서  흘려보냈다.  그렇지만 내 삶을 스스로 꺾을 만큼 우울증이 심하지 않았다. 불안한 20대였지만 29살에 큰 홍역 같은 힘든 시기를 보내고 그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지금은 행복하니까 인생은 새옹지마라는 것을 실감한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죽음에 이토록 집착하고 글을 쓰며 하나하나 기억을 더듬고 있을까?

수많은 사람들을 간호하고 삶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봤다. 대부분 환자들은 살면서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고 ,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느라 정작 내 삶을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그들을 보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며,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졌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 내 마지막 순간만큼은 후회 없었다. 행복한 삶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책모임에서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 나  자신에게 불쑥 들킨 상처가 있었다. 

나의 20대 삶과 30대 이후 삶을 바꾼 큰 사건이었다. 

둘째를 임신하고 그해 설날 연휴가 끝난 2월이었다. 

내가 간호사가 되기까지 큰 영향을 준 사람이기도 했고, 항상 우리를 아껴주던 고모가 위암을 진단받았다. 

쉰 살이 다되어 가도록 행복이라는 것을 크게 누려보지 못하고 살아온 고모였다. 

가난 때문에 하고 싶은 공부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고, 간호사가 되어 새벽부터 저녁 늦게 까지 병원 수간호사로 근무하며 앞만 보고 살아왔다. 가족의 등쌀에 못 이겨 결혼하고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 무엇하나 제대로 하는 방법도 몰랐다.  그냥 일만 했었다. 


고모는 위암을 발견하고 서둘러 수술을 했다. 병문안 갔던 나는

" 고모 , 이제 고모 인생 살아. 하고 싶은 거 하고, 나를 최우선으로 사는 거야"

고모는 그러겠노라 다짐했다. 항암 치료도 받고, 운동도 하고, 그동안 아이 키우느라, 일하느라 하지 못했던 것들을 하며 나름 건강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체력도 약해져 거의 30년을 다닌 직장을 더 이상 나가지 못했다. 체력도 받쳐주지 않았고, 병원에서도 그런 고모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나약해져 버린 육체는 정신까지 갉아먹었다. 

'평생 가족을 위해서 살고 희생했는데 왜 하필 나야!'

가족을 원망하고, 직장을 원망했다. 

여러 번의 항암치료에도 상태는 나빠지기만 했다.  우울증이 심해지고 나서는 바깥출입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당시 고모와 가까이 살고 있었지만 자주 찾아가 보지 못했다 우울증이 심해 이상한 소리만 하고, 외출도 하지 않았다. 간호사인 내가 가봤으면 하는 작은 고모의 말을 듣고 찾아갔을 때는 이미 많은 것이 변했다. 사건 사고 뉴스를 보고 어떻게 죽을지만 고민하고, 어린아이들 걱정만 하고 정작 자신은 이미 끈을 놓아버린 듯했다. 억지로 바람이라도 쐬러 가자고 하며 5월 영산홍이 가득했던 댐 근처 공원에 갔다. 고모에겐 봄이 왔는지 얼마나 예쁜 꽃이 피었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아픈 몸과 세상에 대한 원망, 가족에 대한 원망만 가득했다. 함께 공원에 가서 서로 예전처럼 정답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고모는 세상 원만하고, 나는 그런 고모를 보고도  예민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그날을 마지막으로 고모는 더 이상 만날 수 없었다. 며칠 후 차갑고 변덕스러운 봄날 돌아올 수 없는 강물처럼 가버렸다. 


'그때 내가 알아차리고 병원 진료라도 보게 할걸.. '

'같이 자주 시간을 보낼걸..' 


영산홍이 피는 5월이면 아직도 댐 주변 공원을 예전처럼 지나가지 못한다.  영산홍은 보면 후회만 남는다. 

변덕스러운 봄이면 몸이 먼저 그날을 기억한다. 어이없이 떠난 고모는 가족들 모두에게 큰 상처였고, 나 또한 둘째를 잃을뻔했다. 충격으로 조기진통이 와 다니던 병원에 더 이상 나갈 수 없었다.  한 달을 꼬박 입원하고 두 달을 버티고  나서야 둘째를 만날 수 있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큰 상처를 준다. 그것이 생명이 다해 이별하든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하든 아이를 잃을 수도 있을 만큼 충격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그 사건 이후 나는 이상 앞만 보고 달려가지 않기로 다짐했다. 나의 행복을 희생하며 타인을 위하는 삶은 진짜 내 삶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내 앞의 사람에게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기로 했다. 

후회하지 않는 삶을 위해서 말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단 하나. 수많은 죽음을 보고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지난 시간의 상처를 하나하나 떠나보내는 작업일 거란 생각이 든다. 

누구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만나기 힘든 죽음을 너무나 많이 봐왔다. 사는 게 바쁘다는 이유로, 삶에 여우가 없다는 이유로 나는 그 상처를 대충 묻어두려고만 했다. 충분히 애도하지 못하고 눈물 흘리지 못하고 애써 숨겼던 지난날의 나를 보듬어 주려고 한다. 


어쩌다 문득문득 나는 예전의 아픈 기억으로 수없이 돌아가겠지만 그게 후회와 아픔이 아니라 할머니의 기억처럼 좋은 기억만 남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이 후회가 되지 않도록 오늘 하루 행복한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장례식장에서 든 생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