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는 가정 주부로만 평생을 살았어요. 저도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
" 돈을 벌고 싶어요'
" 코로나로 하던 가게가 망했습니다. 다른 직업을 찾으러 왔어요"
" 20년 넘게 중풍인 남편을 간호하고 있습니다. 더 간호를 잘해주고 싶어서 왔어요"
" 나도 앞으로 나이 들고 아플 텐데 미리 공부하는 심정으로 왔습니다. "
" 나는 합격이 목표가 아니라 , 나를 증명해 보이고 싶었어요"
1년 동안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나하나 모으기 시작했다. 같은 질문이지만 다양한 답변들이 나왔다.
최근 들어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매슬로우가 말한 인간의 욕구 5단계 이론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에이브러험 매슬로우는 1943년 인간 욕구에 관한 학설을 제안한다. 매슬로우의 인간 욕구 5단계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욕구를 갖고 있고 단계별로 만족한다는 것이다.
출처: 네이버 심리학 용어 사전
사람은 기초적인 생리적 욕구를 채우면 안전해지려고 하고, 안전의 욕구가 채워지면 애정과 소속의 욕구를 느낀다. 그리고 순서대로 존경과 자아실현의 욕구를 거친다는 것이 그의 이론이다.사람에 따라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지 않고,혹은 욕구가 동시에 일어난다는 반박도 있지만 이 인간의 욕구 5단계 이론은 비단 의학 쪽에서 뿐만 아니라 마케팅, 심리 ,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용되고 적용된다.
간호학원에서 매번 다른 학생들을 만나다 보면 우리 자녀 세대들에 비해 부모님 세대들은 전쟁의 후유증과 경제적 빈곤을 이겨내고, 생존을 위해 먹고사는 문제에만 집중해온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왜 요양보호사가 되고 싶으세요?
꿈이 무엇인가요?
죽기 전에 해 보고 싶은 버킷리스트가 있나요?
젊은 세대들에겐 왜라는 질문과 내가 하고 싶은 것, 나의 행복이 최선이 되는 것과 달리 이 질문을 하면 대부분 말문이 막혀버리곤 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었나? 하는 표정으로 한동안 침묵이 지속된다.
지난 2년 동안 코로나19로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강제적 고립의 시간을 보냈다. 가족도, 친구들도 마음대로 만날 수 없었고, 누군가는 오랫동안 다닌 직장에서 해고되기도 했다.
2년의 시간이 지나니 누군가와 연결되고 다시 만나고 싶어 하는 욕구가 강렬해진다. 학생 중 하나는
" 제 방을 나가는 것이 목표였어요. 그래서 무작정 학원에 왔습니다"
갱년기, 빈 둥지 증후군으로 집에만 있었다고 했다. 누구와 연결되기 위해 집을 나오기까지 큰 용기와 결심이 필요했다는 말에 가슴이 먹먹했다.
한 중연의 남자분은 맨 뒷자리에서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있었다.
"왜 요양보호사가 되고 싶나요?"
"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
사실 마스크로 그 학생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축 처진 어깨, 항상 고개를 숙이고 수업시간엔 나와 눈 맞춤이 한 번도 없었다. 그 학생은 두 번째 수업 이후 한 달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한 번의 이야기와 만남으로 그를 판단하긴 어려웠지만 타인의 인정을 바란다는 것은 아마 지금 인정받고 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을 것이다. 어쩌면 타인을 의식하고 타인의 인정을 갈망하는 사람은 내가 인생의 중심이 아닌 타인의 시선과 타인의 주장에 쉽게 휘말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남의 인정과 사랑을 갈망하다 마음처럼 되지 않으면 쉽게 좌절하고 만다.
학생들의 배우고자 하는 이유, 왜 요양보호사가 되고 싶어 하는지에 대한 질문의 답을 듣고 있다 보니 여러 가지 생각들이 들었다. 개인이 처한 상황, 나이, 경제적 여유 등에 따라 그 단계와 이유는 다르지만 우리는 한자리에 머무는 존재가 아닌 성장한다는 점에서 항상 보다 나은 나를 위해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욕구를 갖고 살아가는 존재가 인간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간호사 시절의 경험을 돌아보면 삶의 마지막 순간을 지나는 환자들은 ' 내 인생을 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가장 많았다. 타인을 의식하고, 남을 위해 살다 보니 정작 내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간호 계통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나 자신보다는 남을 위하는 것이 익숙하고, 대한민국의 장남, 장녀로 살아온 사람들이 많다. 물론 타인을 위한 삶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심 없이 타인에 의해 휘둘리는 삶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 주위에는 타인을 위해 내 삶을 희생한 사람도 존재한다. 이태석 신부처럼 한국에서의 의사라는 누구나 존경할만한 직업을 갖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낮은 곳으로 향해 아프리카에서 의료 봉사를 하다 대장암으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렇다면 그와 일반 사람들의 욕구는 어떻게 다를까?
아마도 일반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의 기준에서 좀 더 나은 삶, 좀 더 높이 올라가려고 하지만 사회에 봉사하는 이타주의적 사람들은 타인에게 봉사, 소명의식에서 자아실현까지 이른 사람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타인에 의해 규정지어지는 물질적 성공, 행복이 아닌 신념과 완전한 이상적인 나의 모습으로 무단히 앞으로 나아가는 삶 말이다.
단순히 돈을 버는 목적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통해 사회에 봉사하고 , 인정받으면서 돈이라는 것은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 정말 잘 살아왔다. ' 이상적인 나의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 결국엔 자아실현이 완성되는 것이다.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리고 학생들이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렸을 때는 자존감이 아닌 자존심에 목숨을 걸었던 것 같고, 내가 중심이 아닌 타인이 정한 기준에 맞춰 나를 욱여넣듯 살았던 것 같다. 그런 삶은 절대 행복을 가져다줄 수 없고 인생이란 긴 마라톤을 완주할 수도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오늘 아침 < 데미안>의 한 구절 '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진정한 소명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그것뿐이다'를 읽으면서 오직 자기 자신에게 가는 길, 내가 되어 가는 삶을 위해 나, 학생, 그리고 삶의 마지막을 살아내는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것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해본다. 그것이 내 소명이자 진정 내가 원하는 목적지를 가기 위해 나는 오늘도 수많은 점들을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