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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영준 Nov 01. 2020

나라는 어떻게 망하는가 - 6

민씨들 그리고 민영환

을미사변의 소용돌이는 이제 곧 닥치게 되어 있다. 그 전에 살펴보아야 할 변수가 있다. 명성황후의 집안 민씨는 어떻게 해서 최고의 권력자 반열에 올랐을까. 일세를 풍미한 대귀족이 어떻게 짧은 세월동안 그리 많이 나온 것일까. 그들 중 여러 유형의 인물이 있지만, 가장 독특한 사람 중 하나가 충정공 민영환이다. 을사조약에 항거해 자결한 사람.

민영환.
하지만 그의 출세 코스는 왕비의 친가 출신이었기에 가능했다.

1880년대 민영환의 고속 승진은 "아버지가 민겸호"였기 때문에, "양아버지가 민태호"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민씨 집안의 부는 거의 대부분 안동김씨나 풍양조씨가 누리던 것을 대원군이 일부러 빼앗아서 나눠 갖게 한 경우가 많다. 김좌근의 친척들이 살던 전동(견지동), 사동(인사동), 교동 주변의 저택들이 1863년 이후에는 민씨들에게 넘어간 경우가 허다했다. 안동김씨가 거의 60년에 가까이 쌓아 올린 부(富) 이상의 것을, 민씨들은 5-6년만에 누리기 시작했다.

민씨의 대표 정치인 민태호.

왕비가 되기 전에는 가난했다고는 하나, 민씨들의 자부심이 있었다. 인현왕후 민씨를 배출했다는 사실이다. 안국동에 있는 감고당길은 인현왕후가 폐서인된 후 나와 살던 감고당의 이름을 딴 것이다. 지금은 그 저택이 여주시에 복원돼 있다. 명성황후도 그 집에서 살았다. 혈통과 대원군의 정치적 배려로 형성된 막대한 재산과 권력은 민씨 일쪽이 오만해지게 하는데 충분했다.

여주에 복원된 감고당
민씨의 폭정은 반일로 정당화될 수 없다.
그들의 이해관계가 청나라, 러시아와
맞았을 뿐이다.


이런 배경을 갖고서 민씨들이 1880년대부터 1890년대까지 조선에 한 행위들은 가관이었다. 오죽하면 박영효 등이 "민후를 제껴야만 조선에 광명이 온다"고 했을까.  많은 조선 후기사/구한말 전공자들은 그들이 친일 노선을 걷지 않았기 때문에 재물에는 탐욕스럽지만 제법 양심적인 사람들인 것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민씨의 이해관계가 일본과 맞지 않아서일 뿐, 그들 대부분은 러시아나 청나라 등과 깊게 부패의 연결고리로 유착돼 있었다. 경술국치 후에는 일제에 부역하는 인물도 나온다.

영조의 감고당 현판 글씨.



민영환이 을사조약 이후에 별안간 목숨을 끊는다. 하지만 자신이 조선의 기득권층으로서 충분히 지위와 권력을 누려왔다는 것을 자각한데서 나온 행보는  아닌듯 하다.  '매천야록'의 저자 황현이 자결한 것도 마찬가지의 평가를 받을 법하다. 나라가 백척간두에 놓였는데 조상께 부끄럽다며 자살하는것은 정말 제대로 된 양심이라고 볼 수 있을까? 적어도 자신들이 누렸던 기득권 만큼의 대가를 치르려면, 의병이라도 조직했어야 맞는 것 아닐까.

이런 사람들을 '충정공'이라고 칭하고, 오늘날 동네 이름으로도 쓰는 현실이 참 알궂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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