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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영준 Nov 02. 2020

나라는 어떻게 망하는가 -7

궁중 담을 넘는 폭력배들

유길준 그룹과 미우라가 일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던 계기는 1895년 10월 7일의 훈련대 해산령이다. 일본인 교관이 이끄는 훈련대와 미국인 교관이 이끄는 시위대가 서로 충돌하자 민씨 정권은 아예 훈련대를 없애 버리기로 한다. 1884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개화파가 장악했던 친군영을 혁파하고 전,후,좌,우 군영 체제를 만든 것이다. 우영사에 민영익이 임명되어 사실상 장안의 군대가 민씨에게 넘어가는 사건이 벌어 졌다.


우물쭈물하다 갑신정변의 실패를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조바심이 유길준 그룹이 서두르게 한 원동력이었다. 개화당은 언제나 이탈자 컴플렉스가 있었다.


갑신정변에 함께 가담하기로 했던 윤웅렬(윤치호의 부친)은 지방에서 470여명의 군졸을 이끌고 올라오기로 했지만, 막판에는 400명의 병사를 다른 곳으로 빼 버렸다. 대세가 이미 민씨에게 기울어 있다고 판단했던 탓이다. 이런 사태를 방지하려면, 유길준 그룹과 미우라는 주요 병력이 명성황후의 손에 넘어 가기 전에 쿠데타를 완성해야만 했다. 또 미우라가 망설임을 줄이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계속 부추긴 인물이 한성에 와 있었다. 시바 시로였다. 그 역시도 미우라 못지 않은 풍운아로 당시 일본 사회에서 민족주의 열풍이 불게끔 했던 논객이자 정치인이었다.

대륙에서 한몫 잡으려던 일본 낭인들이
왕비살해의 주역이었다. 게중에는
공사관원, 육군사관 등도 끼어 있었다.


10월 7일에서 10월 8일로 넘어가는 밤, 미우라가 ‘입궐 방략서’를 오카모토와 일본인 낭인들에게 전했다. 한성신보사의 기자 역할을 하던 사람들, 공사관 직원들, 일본인 사관 몇이 규합되어 대원군의 공덕리 별장으로 달려갔다. 일본인들은 그곳을 지키고 있었던 순검(巡檢)들을 겁박해 옷을 벗게 하고, 그들의 군복으로 바꿔 입었다.

오카모토 일행은 대원군을 앞세워서 경복궁으로 들어가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정적을 죽이는 데 주저함이 없는 대원군이었지만, 살인의 현장에 직접 얼굴을 내비치는 것은 매우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왕비다. 국왕의 친부가 임오군란 때 구식 군대를 부추기고, 1894년에는 동학군을 사주한 것으로도 모자라 이번에는 왜인(倭人)들까지 끌여 들여 왕비 시해를 주도하는 판이었다. 일부 기록은 “미우라 본인조차도 왕비를 직접 죽여야 하는가에 대해 망설였다”고 한다. 그가 끝까지 일을 내게끔 촉구한 것은 오히려 대원군 쪽이었다. 그런데 왜 입궐 과정이 지연되고 있었던 것일까.

대원군이 을미사변을 '기획'하기까지 하게 된
배경은 결국 권력, 권력, 권력이다.


대원군이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쿠데타 이후 누가 권력을 주도할 것인가에 대한 ‘딜’(deal)이었을 것이다. 대원군은 청나라의 서태후나 공친왕처럼 되고 싶었다. 심약한 군주를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는 섭정의 역할을 늙어서도 놓고 싶어 하지 않았다. 어쩌면 옥좌는 원래 자기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며느리를 도륙해 가면서까지 쥔 권력을 다시 관료들과 일본인들에게 고스란히 넘긴다는 것이 그로서는 상당히 아까웠을 것이다. 만약에 왕비 시해 이후 다시 ‘군국기무처’ 같은 기관이 생겨서 황제를 물론이고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정국이 연출된다면, 쿠데타는 시도하지 않느니만 못했다. 하지만 애써 만들어진 기회를 버리자니 여간 아까운 일이 아니었을 터다. 가만히 있으면 대원군은 자연의 섭리에 의해 삶을 마무리하게 될 것이고(그는 1898년에 별세했다), 민씨 세상은 나라가 망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었다. 나라의 주인이 이씨인지 외척인지 분간이 안가는 상황을 가만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결국 대원군은 10월 8일 3~4시 경이 되어서야 아소당을 나서서 일인(日人)의 인솔 하에 대궐로 향했다.

쿠데타 세력이 경복궁을 본격적으로 덮치기 시작한 것은 네 시 반. 조금 있으면 동이 튼 시각이 될 것이었다. 훈련대원들은 3개 조로 나뉘어 궁궐을 장악해 나갔다. 이들을 꾸짖으며 진군을 막던 홍계훈(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를 업고 도피헀던 인물)은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일본 낭인들은 오카모토에게 지시를 받은 대로 왕비가 머무는 건청궁으로 쳐들어갔다. 그사이 대원군과 미우라 그리고 고종은 대전(大殿)에 있게 되었다. 세 사람은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 왕은 뭐라고 항의하며 몸부림 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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