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것보다 느려도 뛰기로 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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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정직한 제목을 달아 보았다. 그렇다. 오늘 드디어 2024 서울 동아 마라톤을 뛰고 왔다. 종목은 풀코스와 10km 코스였고, 나는 친구 지수와 함께 10km에 참가했다. 생애 첫 마라톤을 위해 4개월 전부터 피나는 노력으로 체중을 감량했고, 식단 조절과 함께 주기에 맞추어 킬로수를 늘리며 꾸준히 러닝해 왔다. 또 이왕이면 기록 단축을 위해 페이스도 점차 어쩌구저쩌구...
...라고 적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전혀 그렇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3월 첫 주에는 음식을 잘못 먹고 탈이 나서 일주일을 날려 버렸다. 그렇게 겨우 회복하고 남은 일주일 동안 터덜터덜 헬스장을 다니며 겨우겨우 20분 남짓 뛰는 생활을 반복했다. 이래서 정말 10km 완주가 가능할까? 대회 이틀 전까지도 러닝 최고 기록은 38분으로 4km를 간신히 채울까 말까 한 수준이었다. 그렇게 틈만 나면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질 때 즈음 최후의 수단으로 오만 곳에 떠벌렸다.
아, 저 낼모레 동아 마라톤 나가잖아요.
네에? 마라톤?
네! 10km 뛰어요!
연습은 잘 했어요?
아, 많이 부족해서 힘들면 걸으려고요.
그렇다. 나는 안 되면 그냥 걷자는 마음으로 일단 오늘을 맞았다. 안 되면 걷지 뭐. 그래도 안 되면 그냥 중도에 포기하면 되지 뭐. 그런 마음이었다. 그렇게 오늘 새벽 5시 10분에 기상. 바람이 불고 안개비가 흩날리는 길을 뚫고 10km 주자 출발 지점인 '잠실 종합운동장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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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누가 봐도 베테랑 러너'인 분들이 속속 등장했다. 보기만 해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탄탄한 몸매와 근사한 차림새. 오! 속으로 탄성을 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렇게 준비가 됐어야 해. 내가 너무 안일했던 게 아닐까. 좀 더 뛰었어야 하는데! 더 노력했어야 하는데! 물론 여기까지 온 것도 장족의 발전이기는 했다. 1년 동안 헬스장을 다니며 근력을 키웠고 달리기도 틈틈이 했다. 하지만 10km를 뛰어 본 적은 없었다. 아 역시 5km 정도가 딱이었을까? 마음 안에 근심을 가득 안고 종합운동장역에 내렸다. 먼저 도착한 지수가 개찰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원래 나와 다른, 실력자 코스에서 뛰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간 운동을 많이 못 했다며 내가 뛸 D 코스에서 같이 뛰자고 했다. 그리고 지수는 뛰는 내내 나의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주었다.
우리는 짐을 맡기고 부지런히 출발 지점으로 향했다. 그때 지수가 한 말을 잊을 수가 없다. 지수는 긴장해서 굳어 있는 내 얼굴을 살피더니 웃으며 말했다.
태주야, 우리 걷지만 말자.
응?
아주 느리더라도 뛰는 걸 멈추지 말자.
앗! 내가 할 수 있을까...? (근심 걱정)
그때 앞 주자들이 일제히 달려 나갔다. 아침 8시 정각이었다. 후미에 서 있던 우리는 8시 10분 출발이었다. 시간이 다가올수록 왜 그런지 점점 초조해졌다. 옆에서 지수가 끊임없이 용기를 주었다. 태주야, 걱정 돼? 어어... 어떤 걱정? 아니, 사실 10km를 뛰어 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난 최고 기록이 38분 4km거든. 그러자 지수가 웃으며 답했다. 아주 천천히 뛸 거니까 걱정 마. 뛸 수 있어. 너무 힘들면 걸어도 돼. 그래도 우리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뛰어 보자. 뛰어서 완주하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런데이 앱으로 처음 달리기를 시작했을 때 가슴에 와 박힌 말이 있었다.
뛰세요! 걷는 것보다 느려도 뛰는 겁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달려 나가세요!
그때는 걷는 것보다 느리면 뛰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지수의 말을 듣는 순간, 런데이 속에서 울려 퍼지던 그 문장이 떠오르며 마음이 새로워졌다.
출발까지 1분. 그 순간,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마음을 버리고 새롭게 다짐했다. 안 되면 걷자는 마음, 그래도 안 되면 포기하자는 마음 대신 아주 느려도 끝까지 뛰어 보겠다는 다짐이었다. 멀리 스타트 라인이 보였다. 어느 순간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천천히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나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옆에서 지수가 출발! 이라고 외쳤다. 음악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귓가에 들려온 첫 번째 노래는 가호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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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 3km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거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응원하고 있었다. 러닝 크루, 마라톤 클럽, 개중에는 홀로 거리로 나와 가족과 지인을 응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성스럽게 만든 플래카드와 현수막을 보며 괜히 울컥했다. 지수와 보폭을 맞추며 천천히 뛰었다. 우리들을 앞질러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났다. 다들 열심히 뛰고 있구나! 나도 계속해서 뛰어야지. 1km마다 숫자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4km 즈음 달렸을 때 조금씩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 내가 뛰어본 최고 거리. 머릿속에서 자꾸 이제 한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 어디선가 '파이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교통 통제 때문에 휴일 출근을 한 경찰관들도 주먹을 쥐어 보이며 파이팅을 외쳤다. 그때마다 알 수 없는 힘이 솟았다.
대각선으로, 유아차를 밀며 달리는 젊은 엄마가 보였다.
시각 장애를 가진 러너가 페이스메이커 봉사자와 함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앞에는 열 살 남짓 된 아이가 아빠 손을 잡고 같이 뛰고 있었다.
그렇게 반환점을 돌았다. 반환점이 나타나기 직전 지하 도로를 통과하는데 사람들이 함성을 질렀다. 나도 모르게 파이팅을 외쳤다. 그러자 옆에서 뛰던 사람들이 같이 파이팅을 외쳐 주었다. 5km 지점에 있던 급수대에서 스치며 물을 마셨다. 그 순간에도 멈추지 말고 끝까지 뛰라고 지수가 말했다. 급수대에 선 사람들이 큰 목소리로 다 왔다!! 를 외쳤다. 반환점을 돌아, 온 길을 되짚어가는 길.
나는 4km 너머의 시간을 뛰어 본 적이 없었기에 그 이후의 시간은 모두 처음이었다. 5km를 찍었을 때가 딱 38분이었다. 혼자 뛰던 때보다 오히려 좀 더 빠른 속도였다. 7.5km를 찍었을 때 1시간이 넘어갔다. 가장 힘든 건 6km와 8km의 사이였다. 조금 걸어 볼까 하는 마음이 계속 들었지만 지수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초반에 했던 약속을 꼭 지키고 싶었다. 쉬지 말고, 걷지 말고 느려도 일단 뛰자. 끝까지.
그렇게 8km를 찍고, 9km를 넘어 마지막 1km가 남았다. 멀-리 우리가 지나 왔던 종합운동장역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로변에 사람들이 서 있었고 연신 '다 왔다!! 조금만 더!!'를 외쳤다. 500미터 정도 남았을 때 드디어 피니시 라인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속도가 빨라졌다. 조금만 더 가자, 조금만! 마지막에 힘껏 스퍼트를 냈다. 나보다 한발 앞서 들어간 지수가 뒤를 돌더니 피니시 라인에 들어오는 나를 찍어 주었다. 크흡. 감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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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결국 완주했다.
10km를 쉬지 않고 달렸고 1시간 17분 39초로 피니시 라인을 통과하며 생애 첫 마라톤을 무사히 마쳤다. 모두와 함께 뛰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뛰는 내내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주었던 지수에게는 큰 빚을 졌다. 그 빚을 갚는 건 아마도 계속해서 달리는 일 아닐까. 피니시 라인 통과 후 간식과 메달을 받고 완주 현수막 아래에서 사진도 남겼다. 지수에게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했다.
지수야, 우리 또 뛰자.
그래!
가을에 또 나가자, 마라톤.
그때는 1시간 10분 안으로 들어오는 걸 목표로 해 봐!
그래!
이렇게 또 목표가 생겨 버렸다. 목표가 있으면 가야지. 갈 수 있지. 이번엔 좀 잘 준비해 보고 싶다. 또 한 이틀 전에 후회를 거듭하는 글을 쓸지언정 일단 호기롭게 남겨 놓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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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겠다는 것과 뛰겠다는 것.
이 둘은 겉으로는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실제 트랙 앞에 섰을 때 상당한 차이를 가져왔다. 바로 마음가짐의 차이였다. 돌이켜 보니, 나는 여차하면 걷겠다는 생각으로 애초부터 '내가 10km를 어떻게 쉬지 않고 뛰어?'라며 한계를 이미 정해 놓고 있었다. 물론 건강과 컨디션이 우선이기에 무리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만, 해 보기도 전에 마음이 이미 져 버린 상태였던 것 같다, 나는.
걷지만 말자, 우리.
천천히 뛰더라도 끝까지 뛰어 보자.
그 순간이었다. 출발선에 선 지수의 말을 들은 바로 그 순간, 신기하게도 마음이 확 달라졌다. 이전에는 없던 마음이었다. 그래, 한번 해 보자. 지난 1년간 아무튼 운동을 놓지 않았던 나를 한번 믿어 보자. 너무 천천히 뛰어 걷는 것보다 느려지더라도 끝까지 뛰는 일을 멈추지 말자. 그렇게 우리는 함성과 함께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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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달리기는 여전히 힘들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고 또 뛰어 보겠습니다. 다음은 11월에 있을 JTBC 마라톤 10km입니다. 즐겁게 계속해서 가 보겠습니다.
모두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