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주 Apr 17. 2024

모두가 짧은 여행 중

두서없는 기록, 사진도 그러하다

-

얼마 전 아빠께서 농담처럼 삼천포에 가자고 하셨다. 농담인 줄 알고 한번 갈까요 하고는 잊었다. 그런데 엊그제 엄마를 통해 다시 한번 삼천포 이야기를 듣고서야 '정말'이라는 걸 알았다. 


하여, 지리산 자락의 한 모텔 비슷한 호텔에서 이 글을 쓴다. 온돌이 된다는 방 하나를 빌려 셋이서 요를 나란히 깔고. 아빠는 버얼써 주무시고 엄마는 TV로 현역가왕 보시고 나는 벽 귀퉁이에 기대어 노트북을 한다. 


-

방금 단 하나였던 전등이 꺼졌다. 엄마는 그사이 현역가왕 끝내시고 전지적 참견 시점으로 채널을 돌리셨다. 아빠는 끄응, 하며 돌아누우셨고 나는 갑자기 들이닥친 어둠에 당황했다가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오늘은 글을, 오래는 못 쓸 것 같다.


-

아침 일찍 출발했다. 내비로 삼천포항을 찍고 한 시간 즈음 달렸을까. 오창 휴게소에 들렀을 때 아빠께 운전대를 넘겨받았다. 아빠는 요새 허리가 안 좋으셔서 복대를 차고 계신다. 평일 오전의 고속도로는 한적했다. 거리마다 여리여리한 푸른빛. 휴게소에 들러 호두과자 한 봉지를 사고 아이스커피도 마셨다. 아빠는 내가 조금만 밟아도 화들짝 놀라며 역정을 내셨... 따스한 조언을 해 주셨다. 


어허!! 얘 좀 봐?? 너 큰일 나!! 우리 차는 이제 늙어서 천천히 가야 돼!! 문짝 날아간다!!


아부지... 전 소심해서 많이 밟지도 못해용... 하지만 문짝이 날아가면 안 되니까 주로 주행 차로와 저속 차로에서 조심하며 달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함양, 진주를 거쳐 사천 표지판이 나왔다. 아빠 엄마는 차창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내다보며 아이처럼 즐거워하셨다.  


-

아빠 엄마는 사천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셨다. 지금은 교명이 바뀐 사천여상 앞 문방구 집 방 한 칸. 그곳에서 오빠가 태어났다. 언젠가 그 자리를 찾아보려고 사천에 내려온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흔적이 조금 남아 있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변해 있었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 있던 것이 사라지고 없던 것이 생겨난다. 쭉 뻗은 사차선 도로 위를 천천히 달리며 사라져 간 풍경에 대해 생각했다. 눈앞으로 높이 솟은 아파트 단지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

사천을 지나 삼천포로 들어섰다. 삼천포항 용궁 시장에 차를 대고 회 한 접시를 시켜 먹었다. 아빠는 엄마 눈치를 슬금슬금 보시다가 소주 한 병을 시키셨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이렇게 신선한 회가 말도 안 되게 싸다며 정말 잘 왔다고 하셨다. 가게 바깥으로 환한 빛이 쏟아졌다.  


-

어린 시절을 진주에서 보냈다. 그때는 영원히 그곳에서 살 줄 알았다. 걸음마를 처음 배운 것도, 처음 자전거 보조 바퀴를 뗀 것도, 처음 학교에 들어가 친구를 사귄 것도 모두 진주였기 때문이다. 연고 없이 무작정 내려가 살았던 그곳에서 엄마는 늘 외로웠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들을 데리고 이웃집 문을 자주 두드렸는데, 한참을 놀고 오면 왠지 미안해서 그만 가야지 하다가 며칠이 지나면 또 문을 두드리고 뭐 하세요- 옆집 애기 엄마예요- 했단다. 


이웃 사람들은 그곳에서 사는 십 년 동안 우리 가족을 다정하게 품어 주었다. 그래서 떠날 때 많이 울었다. 진주를 스치며 그때를 잠시 떠올려 보았다. 열두 살을 끝으로 만나지 못한 어린 날의 친구들은 이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

원래 가려던 온천 호텔이 있었다. 몇 년 전에 아빠가 엄마와, 이모들을 모시고 진주 구경 차 내려오셨을 때 우연히 들러 목욕을 하고 올라가셨다는 그곳. 그 호텔이 기억에 남으셨는지 이번에는 하룻밤을 묵어 보자 하셨는데- 무기한 휴업 중이었다. 망연한 얼굴로 그곳을 보다가 근처에 급히 숙소를 잡았다. 온천 호텔은 이제 안 하나 보죠? 서글서글한 눈을 가진 주인은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예. 꽤 오래됐어요. 한 4년 됐죠.


코로나 때구나. 이곳도, 어쩐지 사람이 뜨막한 듯 고요하다. 한때는 북적였을 식당도 불이 꺼져 어둡기만 하다. 우리는 작은 온돌방 하나를 얻어 하룻밤을 쉬어 가기로 했다. 방바닥이 따뜻하다. 창을 여니 벽 뷰다. 고개를 빼고 낯선 도시를 두리번거리다가 창문을 닫았다. 


-

어제 구례의 한 작은 온돌방에서 쓰기 시작한 글을 오늘 서울로 돌아와 마무리한다. 아침에 호텔 옆의 식당에서 산채 비빔밥을 먹고 남원으로 넘어갔다. 처음으로 가 보는 광한루. 무척 아름다웠다. 원앙과 잉어, 누각과 그네를 실컷 보고 다시 길 위에 올랐다. 한참을 달려 나는 중간에 서울로 오고 부모님은 시골집으로 들어가셨다. 


이틀 동안 700킬로를 달렸다. 오가며 보았던 풍경, 스쳐 갔던 생각들을 잊을까 봐 기록해 둔다. 


-

그리고 어제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세월호 참사 10주기'였다.  


우리는 모두, 짧은 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짧은 여행이 끝나고 나면, 모두가 사라지겠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살아남아 기록되어야 할 역사가 있다. 


죽을 때까지 이야기하겠다.


짧은 여행, 두서없는 기록, 사진도 그러하다_20240417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는 타인의 등을 보고 걷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