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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i Dec 17. 2020

도서관으로 소풍 (혼자의 시간)

횡성군립도서관



어쩌다 보니 백수가 되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남겨진 건 단지 시간뿐이었다. 데굴데굴, 이제 돈마저 모두 증발해 버리고 누구와의 연대도 없는 세계로 굴러떨어진다.

무엇보다 집에서 겪게 되는 부정이야말로 나를 고독 끝까지 밀어 넣었다. 엄마와 동생 옆에서 무안함을 묵인하지 못하면 감정을 쏟아내는 일밖에 안 되는 싸움으로 번졌다.




도시락을 챙겼고 먹을 장소가 필요했다. 마음을 편하게 하고 잠시 휴식 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그렇게 도서관에 다니게 되었다. 책이야 읽는다고 하지만 그 이유로 도서관을 찾는 것만이 아니었다.

이른 아침 저마다 다른 격자가 엇갈린 녹슬어가는 대문들을 지나쳐 파란 조끼를 걸치고 슈퍼 안으로 박스를 나르는 청년, 칙칙 수증기를 머금은 김을 요란히 만들며 납작하게 옷을 다림질하는 세탁소 주인아저씨 그리고 한 손에는 분무기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흰 타올을 들고 유리창을 닦는 커피집 아르바이트 학생, 동네 골목의 생생한 풍경을 뚫고 도서관으로 향한다.




첫번째. 도시락

도시락이 든 가방이 조금 무겁다. 덕분에 오늘 무엇을 어떻게 먹을지 계획 할 수 있다. 채소를 간장에 묵혀 만든 반찬으로 주먹밥을 빚어왔다. 마음 다해 꼭꼭 오래 씹어 천천히 음미한다.




두번째. 산책

내천이 흐르고 새들이 우는소리, 풀잎의 바스락거림 속으로 저벅저벅 순진하게만 걸어들어가지 않는다. 저마다의 기쁨과 슬픔이 만들어내는 생명의 연주에 귀 기울인다.

습관과 무지 속에서와 달리 길 위 겨울의 황량한 풍경은 부드럽고 상쾌하다. 갈대 풀에 남겨진 씨앗이 바람에 가볍게 살랑이고 차가운 공기 속 하늘이 유난히 맑게 펼쳐져 있다.


“최상의 소리를 들으려면 천천히 걸어야 한다. 몸은 극도로 평정해야 한다. 땀을 흘려서는 안 된다. 문밖으로 나오면 엄청난 높이의 공기 기둥이 우리를 누르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이 공기의 압박을 받아 오그라들 수 있다.


대기의 압력은 1평방 센티미터 당 1킬로그램에 이른다. 나는 대기의 압력에 저항하며 간신히 균형을 유지한다. 미풍이 이는 들판의 호밀 이삭처럼 겨우 고개만 까딱까딱 움직일 뿐이다. 방이라면 대기의 압력이 사라진 양 네 활개를 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 문밖은 힘을 아껴 써야 할 장소다.”


<소로의 일기>에서 발견한 노트를 혼자 속으로 중얼거려 보았다.




세번째. 카푸치노

때문에 아끼는 커피집에 들어가 시나몬 가루 솔솔 부드러운 우유 거품 살포시 진한 에스프레소가 한 잔 안에 고이 어우러진 카푸치노를 주문할 수 있다. 혹여나 누구에게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조심스럽게 홀짝인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기쁨이야말로 정말 부러운 일이지만 또 혼자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스스로를 지키는 몫은 자신에게 있다.




책을 빌리거나 디지털 자료를 이용하기 위해 중앙 도서관에 가는 것 외에도 책상을 빌리러 동네 작은 도서관을 찾기도 하고, 서점에 가서 신간 시집을 종종 펼쳐본다. 심지어 시외버스를 타고 다른 도시에 도서관까지 간다.

요즘 횡성 군립도서관 자료실 책상 자리를 유난히 편애하고 있다. 벽이 아니라 창이 있고,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어 눈 쌓인 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책을 핑계로 풍경 안에서 따뜻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다행스럽다.

해가 짧은 겨울 잠시 책의 문장에 한눈을 팔다 보면 어느새 깜깜해져 유리창으로 자신이 반사되고 있다. 하루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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