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였을 것이다.
한자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그전에는 읽지 못했던 글들을 떠듬떠듬 읽게 되었다.
사서삼경 같은 경전을 읽은 게 아니라 신문이나 벽보 등에 실린 몇 글자의 한자들이었다.
묘지에 가면 더 많은 한자를 볼 수 있었다.
비석에 빼곡하게 적힌 글들이 죄다 한문이었다.
그런데 비석의 앞면에 ‘학생(學生)’이라는 글자가 자주 보였다.
여기도 학생, 저기도 학생이었다.
도대체 무슨 학생이었을까 궁금했다.
학생 신분인데 죽었다면 그건 틀림없이 6.25전쟁 때 학도병으로 출전했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에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는 딱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비문 고인의 생몰 날짜가 기록되어 있는데 6.25전쟁 훨씬 이전이었다.
그분들도 모두 학생이라고 표현되어 있었다.
도대체 무슨 학생이 이렇게 많았나 궁금하기만 했다.
수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 학생이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되었다.
의미는 단순했다.
우리 조상들이 유교사상을 삶의 가치관으로 받아들였던 시절로 올라간다.
향교나 서원에 등록하여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을 학생이라고 했다.
아직 과거에 급제한 상태도 아니고 관직에 나아간 상태도 아닌 사람들을 통칭해서 학생이라고 했다.
이런 사람들이 죽었을 때 비석에 학생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만약 관직을 얻었다면 그 관직명을 썼다.
관직을 얻은 사람과 얻지 못한 사람 중에 어느 부류가 많았을까?
당연히 관직을 얻지 못한 사람이 훨씬 많았다.
그들은 모두 학생이라 불렸다.
이렇게 학생이 많아지다 보니까 너도나도 최소한 학생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내 어릴 적에 사장님이나 사모님이라는 호칭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붙였다.
요즘은 웬만한 사람은 다 사장님이고 사모님이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면 그냥 사장님이라고 부른다.
학생도 사장님도 이렇게 흔한 말이 되어 버렸다.
나는 이 ‘학생’이라는 말이 좋다.
학생은 배우는 사람이다.
세상에 배우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없다.
모든 걸 다 배운 사람은 있을까?
없다.
사람은 살아가는 한 계속 배운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
다 배웠으니 하산하라는 말은 중국 무협영화에나 나오는 말이다.
삶에서는 하산할 만큼 다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정말 대단한 존재가 있어서 하산할 만큼 다 배웠다고 하더라도 그가 배워야 하는 게 있다.
하산하는 방법 말이다.
등산객들은 흔히 오르는 길보다 내려가는 길이 더 어렵다고 한다.
“왜 산에 오르냐고?
산이 거기 있으니까!”라는 말을 남긴 영국의 탐험가 조지 말로리는 1924년에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산 정상에 올랐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내려오지 못했다.
올라가는 법은 잘 배웠지만 내려오는 법은 잘 배우지 못했나 보다.
살아가면서 맞닥뜨리는 일들 중에서 배우지 않아도 잘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배우기를 좋아했던 인물 중에 공자를 뺄 수 없다.
이분의 가르침들을 모은 책이 <논어(論語)>인데 나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잘 배우자는 말로 들렸다.
논어 첫 부분은 학이편(學而篇)인데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배우고 또 익히면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말로 시작한다.
부지런히 배우자는 말로 시작한 논어는 20편째인 요왈편(堯曰篇) 3장에서 3가지를 알아야 한다는 말로 끝을 맺는다.
“운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고, 예를 알지 못하면 제대로 설 수 없으며, 말을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을 알 수가 없다(不知命 無以爲君子也. 不知禮 無以立也. 不知言 無以知人也).”
그러니까 자신의 운명, 즉 하늘의 뜻을 알아야 하고 인간관계에서의 예의를 알아야 하며 상대방의 말뜻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들을 알기 위해서 부지런히 공부하라는 말이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공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