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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용서에 대한 단상

by 박은석


사람은 유한한 존재여서 언젠가는 삶의 끝을 마주하게 된다. 종교를 가진 사람은 그 끝 이후에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고 믿는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에게도 그런 믿음이 있었다. 톨스토이의 작품들은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의 종교관을 접하게 된다. 삶의 끝에 다다랐을 때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하는지 그가 한마디 했다. 천국에 가느냐 극락에 가느냐 같은 논쟁거리가 되는 말이 아니라 누구나 고개가 끄덕여지는 유머러스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그의 말은 이것이다. 언젠가 우리의 삶이 끝날 때 우리는 신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그때 신께서 우리에게 “너는 너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고 또 받으며 살았느냐?”라는 질문을 하신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 문장이 사랑을 주고받았느냐는 두 개의 질문으로 엮인 줄 알았다. 그런데 곰곰이 살펴보니 이 문장 안에는 3개의 질문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먼저 “너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았느냐?”라는 질문이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잘 안다. 종교를 믿는 사람도 무신론자도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에 공감한다. 어린아이들도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우리 핏줄을 타고 흐르는 것 같다. 우리 유전자 속에 각인되어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중의 하나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함이다.


둘째로 “너는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살았느냐?”라는 질문이다. 한때 휴대폰 컬러링으로도 많이 애용했던 CCM 중에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가 있다. 제목부터 마음에 울림을 준다. 우리는 우연히 아무 의미 없이 태어난 게 아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평생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살아간다. 아무에게서도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하는 이들은 뭘 몰라서 하는 말이다.


톨스토이가 던진 세 번째 질문은 자기가 아무에게서도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하는 이들이 꼭 귀담아 들어야 하는 말이다. “너는 너 자신을 사랑하며 살았느냐?”라는 질문이다. 설령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내가 사랑을 받을 수 없는 건 아니다.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이 최소한 한 사람은 있다. 무인도에 혼자 떨어진 로빈슨 크로스도 사랑받았다. 세상 모든 사람이 떠나가더라도 나를 사랑해 줄 최후의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바로 나다.


사람과 사랑은 네모와 동그라미 하나의 차이밖에 없다. 닮아도 너무 닮았다. 샴쌍둥이처럼 꼭 붙어 있는 것 같다. 사람 옆에 사랑이 있고 사랑이 있는 곳에 사람이 있다. 사랑 없이는 사람이 있을 수 없고 사람 있는 곳에는 사랑이 있다. 사람은 사랑이 영글어 태어나고 사랑을 먹으며 일어서고 사랑을 받으며 자라가고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고 사랑을 베풀며 늙어가고 사랑을 받으며 떠나간다. 사람은 사랑과 함께 살다 간다. 그래서 사람은 사랑 덩어리라 할 수 있다. 사람이 사랑 덩어리이기 때문에 사랑 덩어리인 두 사람이 만나면 더 큰 사랑이 된다. 두 덩어리가 합쳐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 만나는 곳에는 사랑도 커져간다.


사랑 덩어리이고 사랑하며 살다 가는 존재인데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반드시 따라오는 전제조건이 있다. 용서이다. 용서하지 않고 사랑할 수는 없다. 왜 용서가 있어야 하느냐면 사람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무리 사랑 덩어리라고 하더라도 두 덩어리가 만나면 충격이 발생한다. 부딪히면 아프다. 상처가 생긴다. 이때 그 아픔과 상처를 받아들이는 것이 용서이다. 용서해야 사랑이 된다. 아픔과 상처를 받아들여야 더 큰 사랑 덩어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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